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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장칼럼] '슬픈 땅' 우크라이나 징비록

정상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3.08 16:34

수정 2015.03.08 16:34

[차장칼럼] '슬픈 땅' 우크라이나 징비록

지난 2월 15일 0시부로 '불안한 휴전'에 들어간 우크라이나는 '슬픈 땅'이다. 제대로 민족국가를 형성해 본 역사를 갖지 못했다. 우크라이나는 '변방의 땅'이다. 동슬라브어로 '변경(邊境)'이라는 뜻의 일반명사가 국명으로 굳어졌다.

우크라이나는 몽골(13세기), 리투아니아(14세기) 등 주변 강대국의 침략이 반복됐다. 종교(러시아정교와 가톨릭), 언어(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는 분열의 도화선이 됐다.
동부는 러시아, 서부는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제국에 복속됐다. 17세기부터 러시아 지배를 받은 동남부는 친러시아 쪽이었다. 중서부 지역은 16세기 말부터 수백년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권에 놓여 있었다. 유럽 쪽에 가까웠다. 1917년 제정러시아가 붕괴되고 소비에트연방(소련)으로 편입됐다. 그러나 소련의 경제 수탈과 기근으로 10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석탄, 철광석 등 광산이 몰린 동부지역에 러시아인들이 대거 이주했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고 독립을 선포했다.

'신생 독립국가' 우크라이나는 극심한 혼돈에 빠졌다. 구소련과 경제협력 붕괴, 정부의 무능으로 경제는 끝없이 후퇴했다. 1993년 소비자물가가 5300% 이상 급등하는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서방은 외환시장 개방, 기업·토지 사유화 등 자본시장 자유화를 요구했다. 결국 2000년 들어 서구에 시장을 개방, 수천개의 국영기업을 매각했다. 친서방 자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독립 후 처음으로 6% 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뤘다.

2004년 '오렌지 혁명'으로 친서방 정권(빅토르 유셴코)이 들어섰다. 그러나 혁명세력은 부패했고 경제개혁은 실패했다. 결국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외환 유출, 환율 폭등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그해 11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165억달러)과 함께 유셴코 정권도 붕괴됐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 했던가. 2014년 2월 우크라이나 혁명. 친러정권(빅토르 야누코비치)은 무너졌다. 친서방 정권이 다시 권력을 잡는다. 현재의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이다. 하지만 '친러 대 친EU'로 동서의 갈등은 깊어졌다. 그해 3월 친러 시민들의 지지 속에 크림반도는 러시아에 병합됐고, 4월 친러 반군과 정부군 간의 내전이 발발했다. 경제는 붕괴 직전에 내몰렸다. 100만여명이 살 곳을 잃었고 5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럽의 화약고'는 잠시 총성이 멎었을 뿐이다. 내전의 뿌리는 패권전쟁이다. 러시아는 2300㎞의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급소'와 같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동진(東進)과 유럽연합(EU)의 팽창 전략에 맞서는 정당 방어라는 게 러시아의 논리다. 러시아는 유럽 전체 가스 수요의 3분의 1(1470억㎥)을 공급한다. 이 중 40%가 우크라이나를 경유해 유럽으로 간다. 서방이 에너지, 안보 면에서 러시아의 확장을 막아야 하는 이유다. 미국은 러시아 함대가 주둔한 흑해 맞은편 루마니아 코스탄차, 불가리아 베즈메르에 해군기지와 미사일방어(MD) 기지를 구축 중이다.

이런 패권 다툼은 동아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세계 질서를 주도하고 있는 미국을 견제하고자 중국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두 나라는 군비 지출 1, 2위국이다.
여기에다 일본은 '군국주의 부활'의 위험한 게임을 시작했다. 그 사이에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가 있다.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현실을 우리가 '징비(懲毖.지난 잘못을 징계해 후환을 경계함)'해야 하는 이유다.

skjung@fnnews.com 정상균 국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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