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식 칼럼]

부동자금, 물꼬를 터라

환란 끝 투자 실물로 몰려
공공사업 투자 유도해야

파이낸셜뉴스의 창간 준비가 한창이던 2000년 초. 대한민국이 환란의 긴 터널을 막 빠져나와 제2의 도약대에 올라서던 시기였다. 당시 편집국 일선 기자였던 필자는 창간호 기획 아이템을 '대한민국 주거1번지가 바뀐다'로 정하고 강남 주택시장 취재에 나섰다. 대한민국의 주거1번지는 압구정동이지만 여러 이유로 그 축이 대치.도곡동 일원으로 기울고 있다는 게 기획의 취지였다.

시계추를 거꾸로 돌려서 1999년. 국민의정부는 환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정보기술(IT) 붐 조성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고, 그 정책은 먹혀들었다. 그해 하반기에 계속된 IT랠리는 거대한 코스닥 시장을 만들었다. 구조조정된 실직자들은 대부분 퇴직금과 퇴직위로금을 IT에 쏟아부었고 몇 개월 새 2∼3배는 기본이고 20∼30배, 일부는 그 이상까지 돈을 불렸다. 그리고 IT경기가 꺼지기 직전인 그해 말까지 불린 자금은 그대로 장롱 속으로 들어갔다. 당시 부동자금은 420조원에 달했다.

그런데 2000년부터 경제에 활력이 생기고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지며 장롱 속 돈 가치가 뚝뚝 떨어지자 이 자금이 실물인 부동산 시장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 타깃이 바로 강남권, 대치.도곡동 일원 부동산시장이다. 강남 최고 노른자위인 이 일대는 도곡주공 등 대단위 노후저층아파트 재건축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놓고 부동산 전문가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돌아온 답은 한결같았다. 경기회복과 함께 인플레이션이 본격화되면 장롱 속 돈은 빠져나와 실물로 움직인다는 거였다.

그 예측은 1년쯤 지나면서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2001년 중반부터 부동산시장으로 뭉칫돈이 몰리기 시작했다. 2000년 초 3.3㎡당 매매가격이 1000만원 안팎이던 서울 강남 도곡.대치동 일대 재건축아파트 값이 약 1년 뒤인 2001년 하반기에는 7000만∼8000만원으로 7∼8배 치솟았다. 부동산 시장이 부동자금의 블랙홀이 되면서 과열과 거품이 끼었다. 이게 2007년까지 이어지며 부동산광풍, 부동산 불패신화, 버블세븐 등의 신조어를 양산했다.

집값 폭등은 서민 주거불안 등 각종 사회문제를 몰고왔다. 정부는 2005년 8.31대책을 필두로 수십차례에 걸쳐 시장을 옥죄는 종합대책을 쏟아냈다. 투기와 뛰는 집값을 잡기 위해 모든 수단이 동원됐다. 그런데도 풍선효과가 빚어지는 등 백약이 무효였다. 그칠 줄 모르던 부동산 광풍은 공급과잉과 미국 서브프라임모기지발 글로벌 금융위기로 2008년 들어 급속히 식었다. 그 뒤로 약 4년간 하우스푸어 양산 등 후유증을 부르며 침체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규제혁파를 앞세운 초이노믹스와 함께 최근 다시 빛을 보고 있다.

부동자금의 폐해에 대한 산 교훈이다. 이달 들어 부동자금이 그 당시의 약 두배인 800조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물론 최근 상황은 2000년 당시와는 다르다. 당시는 금리가 연 5%의 고금리로 인플레이션 상황이었고 지금은 1∼2%대의 초저금리 시대다. 돈을 크게 굴리기보다는 원금을 지키는 게 우선이다. 문제는 경기 호황기로 바뀔 때다. 호시탐탐 투자기회를 엿보는 막대한 부동자금은 돈이 된다면 확 옮겨붙는다.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흘러들어가면 이상과열과 거품을 만든다. 그리고 시장이 안정되거나 퇴조하면 거품이 빠지며 금융부실화와 자산디플레이션 등으로 후유증을 남긴다.

사방을 둘러봐도 마땅히 여윳돈 굴릴 데가 없으니 이자생활자의 한숨은 커져만 간다. 기업 곳간도 계속해서 쌓여가고 있다. 정부는 경제를 살리려면 투자와 소비가 덕이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정작 넘쳐나는 돈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부동자금을 경제살리기로 끌어들이기 위한 물꼬를 터야 하는 이유다. 경제살리기 정책에 부동자금 유인책을 병행해야 한다.
공공주택과 각종 인프라 등 정부·민간 공동의 공공사업에 민간펀드의 참여 폭을 더욱 넓히고 창업기업에 대한 민간투자 활성화도 고려할 수 있겠다. 한국 경제는 지금껏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이에 걸맞게 부작용 없이 국민·기업·국가가 모두 윈윈하는 새로운 '바구니'가 필요하다.

poongnue@fnnews.com 정훈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