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노량팔경을 아십니까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3.30 17:04

수정 2015.03.30 17:04

김훈 단편 '영자'에서 탄식.. 컵밥 노점 앞에 '구준생' 즐비

[곽인찬 칼럼] 노량팔경을 아십니까

노량팔경 중 제1경을 아는가. 서울 노량진의 고시텔 주변 식당에 때가 되면 긴 줄이 늘어선다. 식당은 4000원짜리 뚝불과 돈가스, 3000원짜리 김밥+라면을 판다. 노점상은 2000원짜리 컵밥을 판다. 기본 컵밥에 계란프라이를 얹으면 크라운컵밥(2200원), 햄버거 한쪽을 더 올리면 로열컵밥(2600원)이다.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구준생'들은 형편에 따라 식당 또는 노점에서 배를 채운다. 김훈은 단편소설 '영자'에서 이 장면을 노량팔경 중 제1경으로 꼽는다.


소설 속 영자는 '읍 단위 지방 소도시의 질감'을 풍기는 9급 보건직 지망생이다. 그녀의 엄마는 시골에서 순댓국집을 한다. 주인공 '나'는 지방사립대를 나온 구준생이다. "지방에서 무슨 대학을 나왔건, 노량진에서는 모두 지잡대(地雜大)로 평준화되었다… 섹스를 잘 대주기만 한다면 동거녀가 지잡대건 지잡퇴(地雜退)건 나는 상관없었다." 영자와 '나'는 필요에 의해서 1년 반 동거한다. 그렇게 "(노량진의)시간은 메말라서 푸석거렸고 반죽되지 않은 가루로 흩어졌다."

'88만원 세대'의 저자인 우석훈은 "승자 독식 게임에서 새파란 20대가 관록으로 뭉친 40대와 50대를 무슨 수로 이길 것인가"라고 묻는다. 우석훈의 눈에 비친 한국은 아버지와 삼촌이 아들·딸과 조카를 착취하는 비정한 사회다. 가물에 콩 나듯 하는 9급 자리도 위태롭다. 9급 시험을 치르는 40대 공시족의 숫자가 9000명을 향해 진격 중이다. "기성세대란 언제나 젊은 세대를 한심해하지만, 오늘의 한국 사회처럼 극단적인 경우는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다. 정치인들이 20대를 찾는 순간은 선거철, 즉 당장 한 표가 아쉬울 때뿐이다."

지난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서울 관악에 있는 고시촌을 찾았다. 관악을(乙)은 4·29 재·보선을 앞둔 곳이다. 김 대표의 '청춘무대' 공연장은 어수선했다. 일부 청년은 "박근혜정부, 그동안 청년들을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라는 피켓을 들었다. "청년들이 바보냐?"는 손팻말도 보였다. 관악은 원래 야성이 강한 곳이다. 김 대표는 소득 없이 스타일만 구겼다.

얼마 전 중동 순방에서 돌아온 박근혜 대통령은 중동에 필이 꽂힌 것 같다. 틈 날 때마다 일자리는 중동에 있다고 강조한다. "대한민국에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 보라. 다 어디 갔냐고, 다 중동 갔다고." 반응은 신통찮다. 국내에서 질 좋은 일자리를 만들지 못한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사실 우리나라 근로자들이 중동 공사판에서 '노가다'를 뛰던 시절은 끝났다. 일자리가 어디에 널려 있다는 건지 청년들은 의아해한다.

전임 이명박 대통령도 청년들의 나약한 도전정신을 꾸짖었다. 국내의 중소 제조업체들은 직원을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른다. 청년들은 일자리가 없어 안달이다. 구인과 구직이 따로 노는 미스매치다. 그 공백을 외국인 근로자들이 메운다. 이 대통령은 청년들이 눈높이를 낮추면 얼마든지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신입사원 시절 한국엔 이렇다 할 기업이 없었다. 다같이 못 살던 시절이다. 대·중소기업 간 연봉 격차가 하늘과 땅만큼 벌어진 지금과는 다르다. 절대빈곤만큼, 아니 그 이상 참기 힘든 게 상대적 빈곤이다.

필자가 대학생일 때 아버지는 종종 6·25 이야기를 했다. 학생 데모가 한창일 때다. 아버지는 해병 참전용사다. 행여 아들이 돌멩이를 들까 걱정했을 거다. 나는 공연히 반발심이 생겼다. 잠자코 들었지만 속으론 "또 6·25 타령 하시네" 했던 것 같다. 세대 간 거리는 필연적이다.
살아온 궤적이 다른 걸 어쩌랴. 젊은이한테 눈높이를 낮춰 중동으로 가라고 하면 간격은 더 벌어진다. 진정으로 소통을 원한다면 어른들이 눈높이를 젊은층에 맞춰야 하지 않을까. 입은 닫고 귀만 기울일 순 없을까.

"저녁 여섯시 무렵에 시장한 구준생 백여명이 컵밥 노점 앞에 줄을 선다고 할 때 그중 1.3명 정도가 9급 시험에 합격했다.
" 노량진 구준생들, 바로 우리 자식들의 삶이 서글프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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