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식 칼럼]

리스트 파문, 좀 차분해지자

지령 5000호 이벤트
당략 내세운 공세 도넘어.. 경제·민생법안 처리 힘써야

외국인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 국민성은 빨리빨리 문화와 함께 냄비처럼 쉽게 달아 오르고 빨리 식는 민족이다. 우리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빨리빨리 문화는 한국을 신흥경제국으로 키우는 데 기여했다. 1970∼1990년대 경제개발 시대의 압축성장은 빨리빨리 문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21세기 들어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강국으로 올려놓은 것도 빨리빨리 문화다. 무슨 일이 발생하면 후끈 달아올랐다가 이내 훌훌 털고 잊어버린다. 좀 부정적인 뜻이긴 하지만 이것도 우리나라의 국민정서임에 틀림없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은 이런 정서와 무관치 않다.

이처럼 두 가지 모두 잘만 쓰이면 약이 된다. 그러나 이게 지나치면 많은 부작용을 불러온다. 냄비 기질은 더욱 그렇다. 이성보다는 감정을 앞세우게 되고 대화와 소통, 양보와 합의라는 합리성을 저해한다. 때로는 소모적인 논쟁과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며 각종 혼란과 함께 많은 기회비용을 초래한다. 실제로 이 때문에 그동안 많은 사회적 손실을 본 경험이 있다.

요즘 성완종 리스트를 둘러싼 정국 움직임을 보면 이 두 가지의 부정적인 모습을 모두 담고 있는 듯해 씁쓸하다. 지난 15일 국회의 대정부질문에서 한 야당 국회의원이 이완구 국무총리를 '피의자'로 불렀다는 언론보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대정부질문 이틀째인 이날 이 야당 의원은 "대한민국의 총리가 피의자 신분으로 이 자리에서 대정부 질문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다. 피의자는 검찰조사에서 피의 사실이 있는 사람에게 붙이는 말이다. 아무리 정황과 의혹이 있더라도 검찰조사에서 피의사실도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죄인처럼 부르는 것은 지나치다.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의혹이나 정황을 놓고 보면 이 총리는 할 말이 없게 됐다. 그렇더라도 일방통행식 사퇴압박은 물론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정·관계 인사를 모두 싸잡아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도 문제가 있다. 실체적 진실 등 사실 여부에 상관없이 단지 리스트에 올랐다는 이유나 일부 의혹만으로 정치공세를 벌인다면 여론을 호도하고 당사자의 프라이버시나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할 수 있다. 검찰이 막 수사에 착수한 단계여서 아직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상황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한 1차적인 책임은 분명히 정치권에 있다. 정치가 금품로비라는 구태의연한 굴레에서 아직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더불어 당리당략을 앞세운 정치권의 공방 속에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남긴 말 한마디,기록 하나에 정국이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드는 것도 문제가 있다. 성 전 회장이 생전에 저지른, 여야를 비롯한 정·관계와 법조·금융권 대상의 전방위 로비 의혹 등 셀 수도 없는 부도덕한 일들도 차분히 제대로 짚어봐야 한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에 이어 올해 성완종 리스트까지, 한국 경제에 4월은 이래저래 잔인한 달이다. 성완종 리스트는 이제 진실게임으로 옮겨갔다.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한 각종 의혹은 꼬리를 물고 터져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모두가 의혹에만 매달리다보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성완종 리스트는 이제 검찰로 넘어갔다. 그러니 이 문제만큼은 냉정하게 검찰의 수사를 지켜본 뒤 판단은 그 다음에 할 일이다.

가뜩이나 한국 경제가 수출·내수의 동반 부진으로 장기 불황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하루라도 빨리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건 국회, 정부, 검찰, 기업, 국민이 제자리로 돌아가 본분을 다하는 거다.
당장 여야는 이달 임시국회에서 처리하기로 합의했던 공무원연금개혁안 마련에 집중해야 한다. 더불어 경제살리기를 위한 관광진흥법과 크라우드펀딩법, 사회적경제법도 이번 임시국회에서는 반드시 처리돼야 한다. 제2의 성완종 리스트 파문을 막기 위한 정치개혁에 나서는 건 기본이다.

poongnue@fnnews.com 정훈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