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사설

[여의나루] 증거가 진실보다 강한가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5.19 16:36

수정 2015.05.19 16:36

[여의나루] 증거가 진실보다 강한가

진실게임, 진실공방 따위의 단어들이 요즘 난무한다. 분명 한쪽은 거짓인 셈인데 거짓은 항상 증거라는 덫을 악용하고 있으며 그 악용이 성공을 하면 진실은 허위가 되고 공허한 거짓이 진실로 탈바꿈되어 있다. 늑대는 양으로 보이기 위해 양의 탈을 꼭 써야 하지만 양은 이미 양이기에 양의 탈을 쓸 필요가 없다고 해서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오히려 양으로 판결되는 경우를 많이 보아 왔다. 손해 보는 진실에 날개를 달아주는 무능한 법(法)에 분노보다 깊은 허탈을 느낀다.

인류사에 있어 과학, 의학의 발전 속도에 비해 법은 그 속도가 더디다. 따라서 가장 낙후된 부분이다.
더디다기보다 성장이 멈춰 있는 듯하다. 더 이상의 발전이 무의미한 듯 몇 백년 전의 것과 별 차이가 없다. 현재의 법은 유산적 문화 가치로서의 옛 지도, 당시로는 최고의 과학적 근거로 치밀하게 그려졌으나 지형도 사실적이지 않고 내용상 많은 정보도 수록되어 있지 않은, 마치 지금 보면 엉터리로 그려진 듯한 동서양의 앤티크 고지도 수준에 불과하다. 그 정도 법에 우리는 지배받고 있고, 순종하고, 그것이 삶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 의존 자체가 아직도 우리가 신석기, 구석기를 겨우 지난 원시인 수준임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끈 역사, 즉 과학과 의술의 괄목할 만한 발전에 그 합리적 의존을 보면 우리는 역시 현대인이며 만물의 영장임을 또한 느낀다.

그러나 법은 과학적 구체성도 떨어지고 도의적 기준감도 정확하지 않다. 즉 잣대로서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나 무능하다는 것이며, 고지도를 보고 전투에 임하는 어리석은 군인 같다는 것이다. 많은 법의 모순 중에 가장 큰 것이 '증거 위주' 부분이다. '증거 위주'의 중요함은 두말할 나위 없지만 그 증거 의존도가 높아도 너무 높다는 것이다.

증거가 없거나 불충분하면 '죄'라는 진실을 검증해내지 못하는 무능의 법이며, 이는 실존하는 진실과 실제의 사실을 오히려 허구로 만든다. 진실과 객관적 사실보다 한 단계 높은 것이 바로 증거라는 식이다. 증거가 없으면 실존의 진실도 없고 객관의 사실도 무시된다. 주연이 진실이건만 조연급의 증거가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기나긴 역사 동안 진실을 검증하는 증거 위주의 명석함은 인정되지만 진실과 사실이 너무 많은 손해를 보고 있는 실정이어서 답답하지만 500년, 1000년 후에는 당연히 고쳐져야 될 '지과필개(知過必改·누구나 허물이 있는 것이니 허물을 알면 즉시 고쳐야 함)'의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꿈같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지만 모든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뀐 과학, 의학처럼 실행될 것을 기대한다.

검찰에 조사를 받으러 가는 어느 혐의자도 "이 세상에 진실을 이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듯 우리 사회는 '진실'을 존중하고 있기는 하지만 법정에서의 진실은 그저 법정용어에 불과할 뿐이며, 오히려 악인들은 증거가 없으면 진실마저도 없고 증거를 인멸하면 진실도 지우는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증거 악용이 판을 치는 원시사회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다' 하는 사람을 가끔 본다. 굳이 법의 규정이 없어도 세상의 일원으로 룰을 성실히 지키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칭한다. 그러나 평소에 신조가 아예 법을 무시하고 무법, 범법으로 살아가는 사람 역시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다. 지금 이 정도 능력의 법은 경우에 따라 무시 당할 수 있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법이 증거만 중시하고 실제 진실과 사실을 밝혀내지 못하는 한계가 있는 이상 이 욕은 들어야 한다.
현재의 법은 과학, 의학처럼 시대에 따라 많이 업그레이드돼야 한다.

증거 없이도 진실이 인정되는 고도의 법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 법은 비웃음 나오는 상상의 법이지만 미래에 언젠가는 꼭 나와야 하는 법이다. 지금의 법이 얼마나 원시적인지 각성하자.

강형구 서양화가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