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식 칼럼]

지갑을 열게 하자

기업·가계 지출 뚝 떨어져,, 소비·투자 유인책 나와야

'소비가 미덕'이라는 경제 이론을 설파한 이가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라는 걸 알 사람은 다 안다. 그런데 그보다 약 100년을 앞서서 조선시대 이 이론을 편 이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1750∼1805)다. 그는 저서 '북학의'에서 "재물은 우물과 같다. 퍼 쓸수록 자꾸 가득 차고 이용하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비단을 입지 않으므로 나라 안에 비단 짜는 사람이 없다. 여공이 없으므로 그릇이 삐뚤어지든 말든 개의치 않는다. 교묘함을 일삼지 않아서 나라에 장인과 가마와 철공소가 없고 기술도 없어졌다. 그러니 사농공상 모두가 가난해져서 서로 도울 길이 없다"고 했다.

이 이론은 300년을 훌쩍 건너뛰어 우리나라 경제 현실에 투영된다. 세계경기 둔화와 엔화·유로화 약세에 가로막혀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의 수출길이 갈수록 좁아진다. 이런 가운데 장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기업과 가계가 지갑마저 꽉꽉 닫으니 한국 경제가 한파에 빠져든다. 경제가 선순환하려면 투자와 소비가 미덕이다. 그러나 기업은 기업대로, 가계는 가계대로 호주머니를 열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기업·가계 모두 장래에 대한 불안을 느끼는 데다 마땅히 돈 굴릴 곳이 없는 게 지갑을 닫게 하는 큰 이유다. 가계가 허리를 졸라매는 사실은 잉여자금과 총저축률이 잘 보여준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4분기 가계가 쓰지 않고 쌓은 여윳돈이 3년 만에 최대다. 이 기간 가계·비영리단체의 잉여자금 규모는 29조6000억원으로 작년 4·4분기(14조5000억원)의 2배 수준이다. 총저축률도 1·4분기에 36%를 넘었다. 가계가 쓸 수 있는 돈으로 1000만원을 벌어서 360만원을 노후 대비 등을 위해 남겨뒀다는 의미다. 1·4분기 기준으로 1998년 이후 17년 만에 가장 높다. 작년 같은 기간보다 더 늘었다. 총저축률은 1988년 41.7%를 정점으로 하향세를 타다가 2013년 이후 올해까지 3년 연속 상승세다. 소득증가율 둔화와 이에 따른 노후 불안이 가계를 움츠리게 한다. 경기 침체 장기화, 가계부채 증가 등 현실적인 문제도 원인이다.

기업들도 여유자금을 사내에 쌓아 놓고 쓰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10대 그룹 상장 계열사들이 사내에 쌓아둔 유보금이 작년 말 현재 503조원에 달한다. 국가 한 해 예산(올해 376조원)의 1.3배다. 작년 한 해 동안만 서울시 1년 예산(올해 25조원)의 1.5배인 37조원이나 늘었다. 이 중 10대 제조업체의 유보금이 316조원이다. 10곳 중 8곳에서 전년보다 금고를 키웠다. 덩달아 현금성 자산 비중도 매년 크게 느는 추세다. 기업 역시 장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새로운 투자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수도권 규제 등으로 마땅한 투자처가 없는 것도 한 이유다.

기업과 가계가 지갑을 열지 않으면 정부가 아무리 경제활성화를 외친들 대답 없는 메아리다. 이러다간 20년 장기불황에 빠진 일본 짝 되지 말라는 법 없다. 정부는 기업과 가계가 지갑을 열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춰 더 촘촘한 맞춤형 대책을 고민하고 내놔야 할 때다. 일의 안정성을 높이고 가계소득이 크게 오르면 소비는 자연스레 늘어난다. 단기적으로는 한시적으로 비과세 증여한도를 늘리고 일정 규모 학비나 육아비용에 대해서도 세금을 면제하는 일본의 소비진작 정책을 참고해 볼 만하다. 100세 시대에 초점을 맞춰 노후를 맞을 수 있게 하는 노인 일자리·소득증대·재테크 등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사회안전망을 확충해야 한다.

기업에 대해서도 금고를 열게 하는 보다 실질적인 투자유인책을 내놔야 한다. 공장 입지를 제한하는 수도권 규제 완화는 여유자금을 가진 대기업들의 호주머니를 열게 하는 확실한 열쇠다.
정부가 내놓은 공공사업에 대한 민관 공동투자 활성화 세부 계획도 하루빨리 마련해 민간의 투자를 끌어들여야 한다. 투자의욕을 꺾는 마녀사냥식의 무리한 사정을 자제하고 기업인 기살리기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돈은 돌아야 제값을 한다.

poongnue@fnnews.com 정훈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