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칼럼]

삼성, 엘리엇, 그리고 국민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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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벌써 왔다고? 지금 어디에 있어?" 상황이 갑자기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사회가 오전 9시30분에 개최되는데도 오전 8시10분쯤 이사회가 열리는 건물에 도착했다. 그를 기다리던 사진기자들은 서둘러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고 일부 기자는 이사회가 열리는 층으로 뛰었다.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어떻게 생겼어?" 그를 안내한 직원에게 물었다. "키 170㎝로 동양인 같은 체격에 영화배우 더스틴 호프먼을 닮은 것 같았다"고 답했다.

이렇게 쉽게 물러설 한국 기자들이 아니지. 일단 동선을 파악했다. 관계자에게 "건물 가운데 마련된 엘리베이터 외에 다른 출구가 또 있느냐"며 확인 또 확인했다. 오전 9시에 시작된 상임이사회 이후 30분 뒤 열린 이사회가 1시간이 넘도록 끝나지 않자 기자들은 물론 관계자들도 연신 담배를 물었다.

"끝났대"라는 누군가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앞으로 함께 뛰었다. 몰려드는 기자들을 보고 놀라 'close(닫힘)' 버튼을 눌러대는 사이 기자들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는 가방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역부족이었다. 나중에 사진을 확인해 봤더니 처음엔 '놀란 얼굴'이 '화난 얼굴'로 바뀌었으며 곧 "마음껏 찍어라"라며 '포기한 얼굴'로 변해 있다.

그는 바로 '얼굴 없는 투자가'로 유명한 당시 워런 리히텐슈타인 스틸파트너스 대표. 그는 '기업사냥꾼' 칼 아이칸 측의 추천으로 KT&G 사외이사로 뽑혔다. 2006년 4월 19일 서울 대치동 KT&G빌딩에서 열린 주총 이후 첫 이사회에 참석하면서 한국 기자들에 의해 결국 얼굴이 알려지게 됐다.

KT&G를 뒤흔들어 놓았던 아이칸 연합은 그해 12월 5일 주식시장 개장 전 시간외 대량매매로 KT&G 696만주(4.72%)를 매각하며 손을 털기 시작했다. 딱 1년 만이었다. 아이칸 연합은 '지분 시세차익+배당금+환차익' 등을 통해 1500억원을 벌어갔다.

아이칸 연합의 KT&G에 대한 공격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삼성물산 공격과 닮은꼴이다.

아이칸 연합은 KT&G 지분 6.6% 확보를 공시한 뒤 사외이사 후보 추천, 주총결의금지 가처분 신청, 회계장부 제공 요청, KT&G 자사주 매각 가처분 등의 공격을 펼쳤다. "자사주 매각 시 법적책임을 묻겠다"고도 했다.

특히 주총(2006년 3월 17일)을 불과 보름 앞두고 글로벌 의결권 자문회사인 ISS가 일반 사외이사 2명 모두에 대해 아이칸 측 후보를 지지하는 권고안을 발표한 것도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은 것처럼 똑같다. 결국 KT&G는 지지를 선언한 기업은행.국민연금 등 백기사 측 지분 20.51% 덕분에 1년간의 전쟁을 끝냈다.


삼성물산과 엘리엇의 싸움도 국민연금 덕분에 해피엔딩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국민연금이 절대적 위상을 가졌다는 것. 당시 국민연금은 KT&G지분 3.4% 보유했지만 지금은 삼성물산 지분 11.21%를 갖고 있다.

국민연금이 이름에 담긴 '국민'을 의사결정의 최우선 가치로 하는 결정을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courage@fnnews.com 전용기 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