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그리스 협상안 타결] 獨에 백기 든 그리스.. 저소득층 연금 삭감 등 뼈깎는 처방

정상균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7.13 21:59

수정 2015.07.13 21:59

협상안 주요 내용은
860억유로 구제금융 조건 15일까지 개혁안 입법해야 500억유로 국유펀드 설립
메르켈 압박에 결국 굴복 치프라스, 의회 해산 예상 국민들 反獨 정서 커질 듯

[그리스 협상안 타결] 獨에 백기 든 그리스.. 저소득층 연금 삭감 등 뼈깎는 처방

'전쟁은 끝났다.' 독일의 승리다. 그리스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정권은 '긴축'을 수용했다.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시간은 독일 편이었고, '긴축-개혁-구제금융'의 원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상대의 허점(경제마비와 국민불안)을 공격하는 압박전략은 통했다.
그리스가 국민투표에서 61%의 반대로 채권단의 개혁안을 거부했지만 결국 최대 채권국, 유로존 맹주 앞에선 거부의 의미조차 퇴색됐다. BBC방송은 "치프라스 정권은 '삼키기 어려운 약'을 손에 쥐었다"고 했다. 치프라스 정권은 3주째 은행 셔터를 내린 자본통제의 후폭풍을 극복하지 못했다. 국민투표로 '반긴축'을 기대했던 그리스 국민은 결국 또 한번 기약 없는 긴축의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치프라스 정권의 국민투표 명분인 채무탕감(헤어컷)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치프라스 정권의 시리자는 중도좌파 등의 반발로 정권을 지속할지도 불투명하다.

■그리스 어떻게 긴축하나

13일(이하 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에 따르면 독일, 프랑스 등 유로존 정상들은 그리스가 내놓은 추가 개혁안에 합의했다. 이날 도날트 투스크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그리스 유럽안정화기구(ESM)에서 자금을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12일 오후 개최된 유로존 정상회의는 자정을 넘겨 13일 새벽까지 계속됐다. 회의는 16시간 이상 이어졌다. 결과는 그리스가 860억유로의 3차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초강경 개혁조건을 수용해야 하며, 15일까지 연금 삭감 등 추가 개혁안을 입법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로존 재무장관들이 요구한 개혁안은 크게 연금, 노동법, 부가가치세 개혁, 국유자산 매각 등이다. 구체적으로 부가가치세 간소화, 연금시스템의 지속 가능성, 세금 기반 확대, 통계청의 법적 독립성 보장, 재정지출 자동 중단의 완전한 이행, 송전공사 민영화, 부실채권 정리, 그리스 민영화 기구의 독립성 강화 등이다.

이는 그리스가 지난 11일 의회에서 압도적 찬성표로 정부에 위임 처리한 개혁안이 기초가 됐다. 그리스가 지난달 말 국민투표 결과를 명분으로 걷어찼던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개혁안보다 더 가혹한 조건이다. '퍼주기 식' 복지기금과 사회 전반에 만연한 탈세부터 잡으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는 저소득층의 연금을 삭감하고 세금을 올려야 한다. 2년간 재정지출을 130억유로 감축한다. 올해 국내총생산(GDP)의 0.25∼0.5%, 내년 GDP의 1%에 해당하는 연금 삭감에 나선다. 이는 기존 채권단과의 합의안(2년간 79억유로)보다 큰 규모다.

또 사회연대보조제도(EKAS)에 따라 저소득 노령자에게 지급하던 추가 연금을 2019년 말까지 단계적으로 폐지한다. 소득 상위 20%의 연금은 가장 먼저 내년 3월부터 폐지한다. 또 2022년까지 법정 은퇴연령을 67세로 높인다.

부유층 탈세의 상징인 섬 지역에 대한 부가가치세 인하도 없어진다. 음식점에 대한 부가세율도 23%로 일원화한다. 법인세도 기존 26%에서 28%로 올린다. 국방비 지출도 올해 1억유로, 내년 2억유로 감축한다. 특히 500억유로의 그리스 국영자산을 별도 펀드에 편입해 은행 자본확충(250억유로), 부채상환(125억유로), 투자(125억유로)에 활용토록 했다.

■경제마비에 발목 잡힌 치프라스

그간 데드라인(협상 마감시한)은 별 의미가 없었다. 협상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쫓기는 쪽이 치프라스 정권임은 명확했다. 외신들은 "치프라스 정권은 자본통제 이후 경제가 마비되면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평가했다. 치프라스 총리도 "(11일 의회에 제출한) 개혁안이 선거공약에서 후퇴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지난달 30일 국제통화기금(IMF)에 15억유로의 채무를 갚지 못해 사실상 디폴트에 직면한 치프라스 정권은 급격히 무너졌다. 지난달 29일부터 은행들이 문을 닫자 국민들은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앞에서 긴 줄을 서야 했다. 연금을 제때 못 받고 생필품 조달도 어려워졌다. 경제마비에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유럽중앙은행(ECB)의 긴급유동성지원(ELA) 프로그램으로 연명했다.

결국 치프라스 정권은 ECB, IMF, EU 앞에 기존보다 강도 높은 개혁안을 꺼내들 수밖에 없었다. 그 즉시 독일을 제외한 프랑스, 이탈리아 등 친(親)그리스 쪽은 긍정적으로 새 개혁안을 수용했다. 극적 타결이 가까워지고 있는 신호로 보였다. 그러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치프라스 정권이 수용하기 어려운 '한시적(5년간)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라는 압박 카드를 꺼내들었다.

■압박 통했지만 반(反)독일 후유증

'노련한 정치인' 메르켈 총리는 결과적으로 두 가지를 모두 이룰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의 예외 없는 '긴축+개혁'은 그의 고집대로 됐다. 다른 하나는 치프라스 정권의 교체다. 국민투표 이후 치프라스 정권이 힘을 얻는 듯했지만 결국 고강도 긴축 개혁안을 놓고 채권단과 재협상에 들어가면서 국민과 반대파의 반발을 초래했다. 치프라스 정권은 정국 돌파를 위해 올가을께 의회 해산과 조기총선 카드를 내놓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그러나 메르켈 총리도 반(反)독일의 상처를 입게 됐다. '한시적 그렉시트'까지 염두에 둔 초강경 압박은 EU의 분열을 초래한 정치지도자라는 정치적 타격까지 감수한 계산이다. 메르켈 총리는 "유로존 정상들이 그리스 지원을 위해 생각하는 것은 개혁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유럽에선 독일이 그리스에 가혹한 개혁안을 들이밀면서 협상 타결에 장애가 되고 있다는 비판여론이 일었다. 트위터에선 유로존의 제안은 '그리스 국민에 대한 비밀 쿠데타다'라는 해시태그(#)가 20만회 이상 사용됐다.
노벨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도 "순전한 보복과 국가주권의 말살"이라고 독일을 비난했다.

skjung@fnnews.com 정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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