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사설]

빚더미 그리스의 굴욕

'빚은 갚아야 한다' 원칙 앞에 국민투표 꼼수 도움주지 못해

그리스 3차 구제금융 협상이 그리스의 굴복 속에 타결됐다. 그리스는 13일(현지시간) 끝난 유로존 정상회담에서 국제채권단이 제시한 굴욕적인 내용의 협상안에 합의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의 '벼랑끝 전술'은 독일을 필두로 한 채권단의 원칙 고수 입장 앞에 힘없이 무너졌다.

합의안은 그리스 국민들이 지난 5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거부한 긴축안보다 더 가혹한 내용들로 채워졌다. 500억유로 규모의 국유자산 독립펀드 설립과 부가세 인상, 연금 삭감, 노동 개혁 등이 포함됐다. 그리스의 부채탕감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다. 영국의 일간 가디언지는 합의안에 대해 "그리스에 재정주권을 포기하라는 것"이라고 평했다.

시간은 그리스 편이 아니었다. 지난달 29일부터 은행 영업이 중단된 이후 그리스의 연금생활자들은 60유로, 우리돈 7만원 남짓으로 하루를 버텨야 했다. 식료품 사재기가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고 자본가들은 진작 그리스를 떠나 경제는 사실상 마비 상태에 빠졌다. 국민투표를 통한 긴축 거부 결정 이후 그리스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치프라스 정부의 '벼랑끝 전술'은 통하지 않았다. 당초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 일부 채권국들 사이에 동정적인 여론이 일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부채 탕감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협상을 주도한 메르켈 독일 총리의 확고한 원칙론 앞에서 이런 움직임은 먹히지 못했다. 그 원칙은 '빚은 스스로 갚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누가 대신 빚을 갚아주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스는 지난 1월 치프라스정부 출범 이후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를 국제채권단의 긴축 압박에 대항하는 무기로 활용했다. 그리스가 유로화를 버리고 드라크마화로 돌아간다는 것은 유럽 경제통합의 좌초를 의미했다. 유로존 국가들에는 큰 타격이다.

그러나 그리스는 오판했다. 독일은 그렉시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빚을 스스로 갚는다는 것은 유로존 국가들의 경제적 연대를 가능케 하는 기본 원칙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도덕적 해이가 다른 채무국들에 확산돼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독일은 유로존 탈퇴 위협에 굴복해 부채탕감의 선례를 만드는 것이 그렉시트보다 더 나쁜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메르켈 총리는 협상에 앞서 '5년간 한시 그렉시트안'을 흘렸다. 그렉시트는 그리스에만 벼랑이었다.

국민투표를 통한 긴축 거부는 잠시 치프라스의 국내 주가를 치솟게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에서만 통하는 포퓰리즘(인기 영합주의)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스 앞에는 이제 더 가혹한 긴축안이 놓여 있다. 국제채권단은 구제금융 지원과 긴축 이행을 철저히 연계할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더 많은 고통을 감내하며 국제사회에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