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사설]

벌처펀드에 한국이 놀아나선 안 된다

지령 5000호 이벤트
아르헨 디폴트 교훈 삼아야.. 삼성, 지배구조 약속 지키길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주주총회가 17일 열린다. 한국은 물론 세계가 주총 결과를 주시하고 있다. 이번 주총이 글로벌 이슈로 부각된 것은 오로지 엘리엇 매니지먼트라는 미국계 헤지펀드 때문이다. 엘리엇은 합병에 반대한다며 동네방네 떠들었고, 다른 주주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법원에 가처분신청도 했다. 여느 주주들과는 판이한 행태다. 10여년 전 SK그룹을 괴롭힌 소버린 펀드의 재판이라 할 만하다.

다행히 우리 법원은 소송을 통한 엘리엇의 지연작전에 휘말리지 않았다. 두 건의 가처분은 모두 기각됐다. 법원의 판단은 오늘 의결권을 행사할 주주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엘리엇은 주주가치 확대라는 근사한 명분을 앞세워 양동작전을 폈다. 주주들의 판단력을 흐리기 위해 벌처펀드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다. 법원은 이를 정확히 간파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의 주요 주주인 국민연금 역시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남미의 아르헨티나 정부는 지금도 엘리엇 '혹'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지난해 여름 미국 법원은 '아르헨티나 정부 대 엘리엇' 소송에서 엘리엇의 손을 들어줬다. 판사는 아르헨 정부가 먼저 엘리엇 등 헤지펀드에 꾼 돈을 갚지 않는 한 다른 채권자들의 돈을 갚아선 안 된다고 판시했다. 결국 아르헨 정부는 기술적인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해결책을 호소했으나 소용없었다. 화가 치민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주권 침해를 이유로 미국 정부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했다. 아르헨 정부와 엘리엇의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아르헨 정부는 지난 2001년 외채 1000억달러에 대한 디폴트를 선언했다. 그뒤 채권자 92%와 최대 75%에 이르는 부채 탕감에 합의했다. 이때 엘리엇은 합의에서 빠졌다. 그러곤 미국·영국 법원에 빚을 100% 다 갚으라는 소송을 냈다. 엘리엇 등 헤지펀드들의 채권은 13억달러에 불과하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제 잇속을 챙길 수 있다면 국가를 상대로도 도박을 서슴지 않는 게 벌처펀드의 속성이다. 엘리엇은 지난 2012년 아프리카 가나에 정박 중이던 아르헨 해군 함정을 압류한 일도 있다.

주총에서 합병이 부결되면 벌처펀드의 전략에 놀아나는 꼴이다.
아르헨티나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주주들의 현명한 판단이 요구된다. 대신 삼성은 이번 주총을 계기로 지배구조 개선 약속을 확실히 지켜야 한다. 엘리엇에 틈을 보인 것은 분명 삼성의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