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사설

[정훈식 칼럼] 집 나온 백화점

정훈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7.27 16:37

수정 2015.07.27 16:37

장기불황에 땡처리 등장, 생존 앞에 고급 이미지 옛말.. 10년뒤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정훈식 칼럼] 집 나온 백화점

10∼20년 전만 해도 일반인들에게 백화점은 '아이쇼핑'하는 곳이었다. 백화점에 가면 화려함에 놀라고 어마어마한 가격에 또 한번 기가 눌린다. 웬만한 소비재도 일반 상점에 비해 가격이 최소 2∼3배는 비싸다. 고급 의류는 한 벌에 몇백만원은 기본이고 털 코트 하나에 몇천만원짜리도 있다. 호주머니가 가벼운 일반인들에겐 일반 소비재 구입도 언감생심이다. 돈을 모으고 모아 큰맘 먹고 백화점 상품을 하나 사거나 뜻밖의 선물을 받으면 애지중지 아끼고 또 아껴 쓴다.
돌이켜보면 당시의 백화점 상품은 요즘의 '명품' 그 이상인 셈이다. 시중에 파는 것과 같아 보이는 상품인데도 가격이 최대 몇 곱절은 비싸니 가격 거품 논란도 다반사였다.

고품격 쇼핑을 앞세운 백화점의 체면이 요즘 말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백화점 문턱이 확 낮아졌다. 옷과 화장품은 물론이고 명품 구입을 위해 백화점을 찾는 일도 잦아진다. 심지어 반찬거리도 백화점에서 장만한다. 상품이 제때 제대로 팔리지 않고 재고가 쌓여만 가니 80∼90%까지 가격을 낮춘 땡처리도 등장했다. 여느 전통시장이나 폐업정리하는 점포에서 볼 법한 일이 백화점에서 벌어진다. 화려한 집을 떠나 소비자들을 찾아나서기까지 한다.

국내 최대인 롯데백화점이 재고 처리를 위해 집을 나왔다. 지난주 경기 고양 킨텍스에 1만3000㎡ 크기의 전시장을 통째로 빌려 재고상품에 대해 최고 80% 할인된 가격으로 '땡처리'를 했다. 지방시, 끌로에, 멀버리 등 명품들도 대열에 합류했다. 롯데는 앞서 지난 4월 서울 대치동 서울종합전시장에서도 같은 세일행사를 벌여 재미를 봤다. 백화점이 손님을 찾아가는 시대가 됐다. 생존 앞에 품격도 권위도 모두 내려놓았다. 다른 백화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백화점이 손님을 찾아 집을 나서고 파격할인 행사를 하는 것은 소비부진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 단초를 제공했다. 메르스 이후 외국인 관광객 감소 등으로 극심한 판매부진에 빠졌다. 가뜩이나 수출과 내수부진으로 경기마저 저성장의 늪에 빠져든다. 경기의 악순환이다.

더 근본적으로 백화점이 한계산업, 사양산업으로 치닫는 게 진짜 이유다. 그 핵심은 소비성향의 변화다. 세계는 지금 4차원 유통.소비시대다. 백화점이나 명품가게를 직접 가지 않아도 손가락 하나로 세계적인 명품을 직접, 싸게 구입할 수 있다. 인터넷쇼핑 활성화와 함께 전자결제 등 전자상거래의 진화가 직접구매 시대를 열었다. 똑같은 상품을 더 싸게 살 수 있는 직구와 특화매장 등 상거래 채널은 빠른 속도로, 다양한 형태로 진화한다.

작년 국내 백화점의 총매출액은 29조2300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약 2% 줄었다. 백화점 매출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10년 만이다. 롯데.현대.신세계 등 3대 백화점의 작년 영업이익 총액은 1조600억원으로 3년 내리 감소했다. 이에 비해 작년 국내 온라인쇼핑몰과 모바일쇼핑몰의 총매출은 각각 17%, 125% 늘었다. 해외 직구도 전년 대비 약 50% 늘었다. 백화점의 위기는 세계적인 추세다. 미국의 백화점 체인인 JC페니는 최근 5년 새 매출이 30% 줄었다. 영국의 막스앤드스펜서, 중국의 일본계 백화점 이토요카도는 실적이 안좋은 점포를 정리 중이다.

바야흐로 융복합 시대다. 백화점의 생존법칙도 전문화와 융복합화다. 오프라인 중심의 유통산업은 저물고 있다. 단순히 오프라인에서 모든 상품을 나열해 판매하는 이른바 '백화점식 영업'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정보기술 기반 속에 금융, 물류, 건강, 문화, 여행 등 원스톱 서비스를 융합한 복합업종으로의 변신이 해법이다. 어쩌면 앞으로 5년 후 또는 10년 후엔 '백화점'이라는 업종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말라는 법도 없다.
백화점의 앞날이 자못 궁금하다.

poongnue@fnnews.com 정훈식 논설위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