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 칼럼] 산업은행을 또다시 손본다니

김용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09.17 16:53

수정 2015.09.17 16:53

[데스크 칼럼] 산업은행을 또다시 손본다니

정부가 산업은행의 역할을 재조정한다니 쓴웃음부터 나온다. 이제는 솔직히 믿음이 안 간다. 산은을 오늘의 누더기로 만든 책임의 8~9할은 정부에 있다. 그 정부가 다시 한번 산은을 수술대에 올린다고 하니 믿고 싶어도 마음이 동(動)하지 않는다.

산업은행의 역할에 대한 논쟁은 한국 개발금융의 오래된 숙제 중 하나다.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기에서 벗어나자 산은의 역할 재조정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다.
이러한 고민이 한국산업은행법에 잘 드러나 있다.

지난 1953년 7월 6·25전쟁이 끝난 그해 12월 한국산업은행법이 제정됐다. 제정 시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폐허가 된 한국 경제를 재건해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 산은법은 태동했다. 법 제정 당시 산은의 설립 목적 1조에는 '…중요산업자금을 융자·관리함을 주요목적으로 한다'고 돼 있다. 당시 경제발전과 산업부흥을 위한 자금조달 창구로서 산은의 존재가치는 상당히 높았고 국내 굴지의 기업이 산은의 지원 속에 급성장했다.

이 1조가 산은법이 태동한 지 56년 만인 지난 2009년 대수술을 받게 된다. MB(이명박)정부가 들어서면서 산은의 기틀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1조는 "…한국산업은행의 민영화 과정을 이행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다"로 바뀌었다. 산업은행의 존재가치가 민영화를 위한 과도체제 정도로 확 꺾인 것이다. 이후 5년간 산업은행은 유럽 중세의 암흑기에 비견될 정도로 정체성이 모호해졌다. 지점 확충, 고금리를 동원한 수신 확대 등 민영화를 위한 단계적 조치, 몸집을 키우기 위한 수단들이 동원됐다. 그럼에도 민영화의 길은 보이지도, 열리지도 않았다. 국가 정책적 목적에 의해 거대 부실기업을 떠안고 있고, 앞으로도 그 역할이 필요한 상황에서 산은의 민영화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결국 산은의 민영화를 포기하고 목적을 다시 바꿨다. 이제 산은법 1조는 '산업의 개발.육성, 사회기반시설의 확충…지속 가능한 성장 촉진 등에 필요한 자금 공급.관리'다. 존재의 목적이 구체화됐지만 기본적으로는 산업에 대한 자금 공급으로 5년 전과 비슷해졌다. 5년 만에 원점으로 되돌아왔지만 산은의 상처는 너무 깊다. 산업은행에서 옛 위상을 찾아보기는 어려워졌다. 세상이 바뀐 것도 있지만 정부가 만든 상처로 누더기가 된 탓도 크다. 이 상처를 아물게 하는 치유가 병행돼야 한다.

요즘 흘러나오는 역할 재조정 방향은 산은이 앞으로 대기업에서 손을 떼고 중견 또는 벤처기업 육성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대우조선해양 정상화에 실패했으니 모든 대기업에서 손을 떼라는 얘기다. 정부의 의도가 이대로라면 큰일이다. 국제경쟁에서 밀려 생사의 임계점에 도달한 기업들이 앞으로도 숱하게 나올 것이다. 그때마다 생사를 민간은행에 맡길 경우 결과는 뻔하다.
이래도 될 만큼 한국 경제가 성숙했나? 조선, 철강 등 국가 기간산업을 지키고 구조조정을 통해 환골탈태시켜 국가 경제의 근간으로 삼아야 한다. 되살아나는 섬유산업처럼…. 마지막 보루로서 산업은행의 역할은 남겨두되 권한을 부여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확실하게 묻는 게 현재로서의 차선책일 것이다.
3년 후 다시 산업은행을 도마에 올리지 않으려면 정부는 좀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

yongmin@fnnews.com 김용민 금융부장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