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불쌍한 산은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0.05 17:24

수정 2015.10.05 17:24

국책은행 중 맏형 자부심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부실기업 해결사 전락
[곽인찬 칼럼] 불쌍한 산은

KDB산업은행은 이상한 조직이다. 은행이지만 은행장이 없다. 그 대신 회장이 있다. 다른 금융지주사에도 회장이 있긴 하다. 하지만 신한·KB·하나금융지주엔 회장 아래 은행장이 따로 있다. 산은은 회장 아래 바로 수석부행장이다.
'은행장 없는 은행'은 산은의 굴곡진 역사를 보여준다.

원래 산은엔 총재가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이 명칭을 고깝게 여겼다. 월가통인 민유성 '총재'는 임명권자의 의중을 충실히 따랐다. 그는 취임식 날(2008년 6월 11일) 기자들에게 "법률적으론 총재이지만 은행장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민영화가 이뤄지면 민간은행들과 호흡을 같이해야 하는데 혼자만 총재라고 하면 모양이 맞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민유성 '총재'의 뜻은 1년 뒤 이뤄졌다. 2009년 5월 국회는 "산업은행에 임원으로 은행장, 이사 및 감사를 둔다"는 한국산업은행법 개정안(9조)을 통과시켰다. "…총재.부총재.이사 및 감사를 둔다"는 조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통 산은맨들은 명칭 강등이 못마땅했다. 산은 총재는 한국은행 총재와 맞먹었다. 그런데 격 떨어지게시리 은행장이라니.

그러던 차에 기회가 왔다. 그새 이명박정부는 박근혜정부로 바뀌었다. 새 정부는 산은 민영화를 포기했다. 산은을 국가대표급 투자은행(IB)으로 탈바꿈시키려던 꿈은 꿈으로 끝났다. 산은은 다시 정통 정책금융기관으로 복귀했다. 갈라져나갔던 정책금융공사도 흡수했다. 때맞춰 국회에선 격에 맞게 은행장을 총재로 바꿔야 한다는 논의가 오갔다. 하지만 총재라는 명칭이 너무 권위주의적이라는 지적에 부닥쳤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게 '회장'이다. 2014년 5월에 통과된 산은법 개정안은 산은 임원으로 "회장, 전무이사, 이사 및 감사를 둔다"(10조)고 규정했다.

바꿔놓고 보니 나름 적절한 선택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회장 하면 보통 재벌 회장을 떠올린다. 재벌은 수십개 계열사를 거느린다. 산은 자회사는 그보다 더 많다. KDB대우증권·대우조선해양이 대표적이다. 자산 규모로 보면 산은은 웬만한 재벌 뺨친다.

재벌급 국책은행 산은을 두고 구조조정의 종착역이라 한다. 하다하다 안 되면 결국 산은이 부실기업을 떠안는 데서 나온 말이다. 어쩌다 산은이 부실기업 해결사가 됐을까. 원래 산은은 부실 처리하라고 만든 회사가 아니다. 출범(1954년) 당시 산은은 전쟁으로 파괴된 산업시설을 복구하고 전력·석탄 등 기반산업을 지원하는 데 목적을 뒀다. 이 목적은 외환위기 전까지 잘 유지됐다.

외환위기가 산은을 망쳤다. 위기 초기엔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해 부실기업을 살렸으나 무한정 세금을 동원할 순 없었다. 얼추 2003년 이후 공적자금 돈줄이 끊겼다. 하지만 그 뒤에도 부실기업이 속출했다. 그 공백을 메운 백기사가 바로 산은이다. 수출입은행도 거들었다. 그 뒤 미래지향적이어야 할 산은은 망한 기업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산은법 1조(목적)에 산은의 슬픈 역사가 묻어 있다. 이명박정부는 2009년 산은법을 바꿀 때 설립 목적에 '민영화 이행'을 넣었다. 5년 뒤 민영화를 포기한 박근혜정부는 '…그 밖에 지속 가능한 성장 촉진 등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관리한다'는 내용으로 1조를 개정했다. 존재 이유를 밝힌 1조에 '그 밖에'라니 해도 너무했다. 산은의 설립 목적이 정권 입맛에 따라 널을 뛴다. 책임자의 명칭도 총재·은행장·회장으로 춤을 춘다. 장기판의 졸도 아니고 국책은행 중 맏형이 이게 뭐람.

아니, 어쩌면 산은은 이런 처지를 즐기는 게 아닐까. 망할 염려 없는 데다 부실 자회사에 낙하산 보내는 재미가 쏠쏠하니까. 산업은행은 영어로 Korea Development Bank(KDB)로 쓴다.
직역하면 한국개발은행이다. 그러나 개발은 뒷전으로 밀렸다.
산은을 산은답게 제자리로 돌릴 순 없을까. 환갑, 진갑 다 넘긴 산은이 불쌍하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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