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사설

[곽인찬 칼럼] 불쌍한 산은 2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1.02 17:02

수정 2015.11.02 17:02

국책은행을 총알받이 삼아 부실기업 구조조정의 룰을 정부가 앞장서서 깨뜨려
[곽인찬 칼럼] 불쌍한 산은 2

국책 산업은행이 불쌍하다. 뭇매를 맞고 있어서다. 지난달 하순 산은은 좀비기업의 대명사가 된 대우조선해양에 4조2000억원을 추가 지원하기로 했다. 여론은 비판 일색이다. 대우조선이 제시한 자구책이 미흡하다, 돈을 또 댄다고 살아날 가망이 있느냐,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책임은 누가 질 거냐, 왜 민영화에 늑장을 부리느냐 등등. 산은은 동네북이 됐다.

그런데 가만, 대우조선이 망가진 책임을 온통 산은이 뒤집어쓰는 게 맞나? 다른 사람, 다른 기관은 책임이 없나? 산은이 다 잘했다는 게 아니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을 일선에서 잘못 관리한 책임이 분명 있다. 하지만 이게 산은만 몽둥이찜질을 당할 일인가.

4조2000억원 신규 지원만 해도 그렇다. 그 결정은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내려졌다. 참석자는 최경환 부총리, 임종룡 금융위원장,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다. 홍기택 산은 회장도 참석했지만 그 자리에서 누구 말발이 더 센지는 세상이 다 안다. 겉으론 신규 지원을 보류하고 대우조선에 선자구책을 요구했지만 '척' 했을 뿐이다. 노조가 임금동결.파업자제 동의서에 도장을 찍자마자 산은은 지원안을 발표했다. 최 부총리, 임 위원장, 안 수석은 산은 뒤에 몸을 숨겼다.

이래 갖곤 기업 구조조정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구조조정은 피를 말리는 작업이다. 때론 알짜 계열사도 팔아치우고, 직원도 왕창 줄여야 한다. 감원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는 쌍용차 해고 때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도 회사를 살리려면 눈물을 머금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 권력이 끼어들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적 금융 풍토 아래서 채권은행들은 윗분들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물정 모르고 칼을 휘두르다 미운털이 박힐지도 모른다. 알아서 기는 관치의 악순환이 반복된다.

시장엔 기업 구조조정의 룰이 있다. 부실 기미가 드러난 기업은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맺고 자구 노력을 편다. 이게 1단계다. 그래도 안 되면 2단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으로 간다. 그래도 안 되면 3단계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를 밟는다. 3단계는 법원의 몫이다. 1~3단계 어디에도 정부가 개입할 법적 근거는 없다. 하지만 대우조선 사례에서 보듯 정부는 불쑥 끼어든다. 그럴 때마다 시장의 룰은 작동불능 상태에 빠진다.

정부 개입이 불가피할 때도 있다. 국가 경제가 시스템 리스크에 노출됐을 때다. 외환위기가 터지자 정부는 공적자금을 조성했고 그 돈으로 나라 경제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했다. 이른바 대우사태가 터지자 대우조선에도 공적자금 2조9000억원을 지원했다. 그 덕에 대우조선은 기사회생했다. 하지만 정부의 역할은 거기서 그쳐야 했다.

지금은 섣불리 정부가 나설 때가 아니다. 구조조정은 시장 자율에 맡기는 게 좋다. 부실기업을 솎아내는 것이야말로 은행의 주특기다. 은행은 고객 돈을 굴려서 번 돈으로 이자를 지급한다. 행여 돈을 떼이면 낭패를 보기 때문에 늘 기업에 깐깐하게 군다. 부실기업엔 말할 것도 없다. 은행에 비하면 정부의 부실기업 처리는 물컹하기 짝이 없다. 당장 제 돈을 떼일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정부의 잦은 개입은 좀비기업들을 응석받이로 만든다. 시스템 리스크로 번지지 않는 한 정부는 나서지 마라. 은행들을 믿고 맡겨야 한다. 이미 정해진 룰도 있다. 지난달 26일 산은 노조는 "(대우조선이) 법정관리가 되더라도 원칙에 근거한 구조조정을 하라"고 요구했다. 이 목소리는 깡그리 무시됐다.

산은을 감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산은은 대우조선에 투입된 공적자금, 곧 혈세를 회수해야 할 책무를 한시도 잊어선 안 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부의 인내심이다. 산은을 총알받이 삼아 뒤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비겁하다.
산은 돈은 미래 성장동력 산업을 육성하는 데 써야 한다. '부실기업 종합처리센터'로 전락한 산은이 불쌍하지도 않은가.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