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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빅딜의 악몽

파이낸셜뉴스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1.11 17:04

수정 2015.11.11 17:04

정부 주도 구조조정은 필패.. 외환위기 때의 교훈 잊었나
기업·채권단 '자율' 우선해야
[이재훈 칼럼] 빅딜의 악몽

김대중(DJ)정부가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인 2003년 1월 1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김 대통령 주재로 '국민의 정부 정책 평가 보고회'가 열렸다. 국무총리실 산하 정책평가위원회는 1000쪽이 넘는 평가보고서에서 5개의 '뼈아픈 실책'도 선정했는데 첫 손 꼽히는 것이 외환위기 직후 5대그룹, 7개 업종에 대해 추진한 '빅딜(사업맞교환)'이었다.

보고서는 "민간기업의 사업구조에 정부가 직접 개입한 빅딜 정책은 그 파급효과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했고 시장경제 원리에도 맞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와 함께 정부의 직접적 규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고 그에 대한 책임문제를 발생시키며 문제해결을 위해 정부 개입이 지속되는 상황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게 무슨 말일까. 1999년의 현대·LG그룹 간의 반도체 빅딜과 삼성·대우그룹의 자동차.전자 맞교환을 돌이켜보면 그 난맥상을 알 수 있다.

LG반도체나 현대전자는 사업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특히 구본무 LG 회장은 반도체를 그룹의 성장동력으로 키울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정부가 두 기업을 합병하라고 하더니 곧이어 LG반도체를 규모가 작은 현대전자에 넘겨주라고 요구했다. DJ는 버티는 구 회장을 청와대로 불러 결국 항복을 받아냈다. 그 후로도 LG와 현대가 매각 가격을 놓고 지루한 공방을 벌이자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이 중재에 나서 2조6000억원에 거래를 마무리지었다.

LG는 '꿈'을 잃었고 현대는 인수대금을 치르느라 자금난에 빠진데다 이어진 반도체 불황에 10조원의 빚을 짊어지고 침몰했다. 이른바 승자의 저주다. 반도체 통합회사 하이닉스는 장기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거쳐 3년 전 SK에 넘어간 이후 최고의 실적을 내고 있다. LG나 현대는 얼마나 속이 쓰릴까.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맞교환도 명분은 나쁘지 않았다. 각자의 한계기업을 정리하고 핵심역량을 키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만고만한 누더기 기업을 놓고 양측은 "현금(3조5000억원)을 얹어달라"(대우그룹), "두 회사를 그냥 교환하면 계산이 비슷하다"(삼성그룹)며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타협이 안되자 삼성자동차는 1999년 6월 30일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고 이 딜을 통해 자금 조달을 기대했던 대우그룹도 두 달 후 자금난으로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박근혜정부의 첫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조원동 중앙대 석좌교수는 "두 기업은 상대방이 정부 압력에 굴복하기를 기다리며 끝끝내 버텼다. 정부가 너무 깊이 개입했기 때문에 빅딜이 실패한 것"('경제는 게임이다')이라고 봤다. 빅딜의 실패는 정부 주도의 강제적인 사업재편이 우리 경제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모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1980년대의 중화학공업 투자 조정, 산업합리화정책 같은 것은 개발독재시대의 유물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최근 조선.해운.철강.화학 등 주력업종의 부실화가 가속되자 정부가 기업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빅딜의 악몽을 잊은 것일까. 경제부총리 등이 참석하는 청와대 서별관회의는 대우조선에 대한 지원책을 마련했다. 최근에는 정부가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의 합병을 추진 중이란 보도가 나왔다. 해당 기업들이 거세게 반박하자 정부도 "개별기업 구조조정은 채권단과 기업의 협의 아래 추진되고 있고 정부가 강제하는 것은 없다"고 해명했지만 시장은 믿지 않는 분위기다. 앞서 정부가 포스코에 계열사 대우인터내셔널을 매각토록 권고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정부는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 대우조선 사례에서 보듯 섣부른 정부 개입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정부의 역할은 기업과 채권은행이 자율 빅딜에 나설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 기업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원샷법)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먼저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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