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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석학에 듣는다] 벤 버냉키의 비극

송경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1.13 17:04

수정 2015.11.13 17:04

[세계 석학에 듣는다] 벤 버냉키의 비극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의 신간 회고록 '행동하는 용기'는 읽기가 곤혹스럽다. 비극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는 임명 당시 전 세계에서 그 일에 가장 잘 준비됐지만 곧 자신이 이를 극복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음을 깨닫고, 정책 뒷북을 치면서 현실을 결코 따라잡지 못한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2007~2008년의 (금융위기) 충격이 또 다른 대공황으로 번지지 않은 것은 버냉키의 공이 크다. 그러나 이후 그의 행보는 의외로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2000년 버냉키는 중앙은행이 충분한 의지만 있다면 '언제나' 적어도 중기적으로는 양적완화(QE)를 통해서 경제를 온전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앙은행이 돈을 충분히 찍어내고, 금융자산을 사들이면 사람들도 지출을 늘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QE 가운데 극히 일부만 항구적인 것이라고 믿더라도, 또 지출 유인이 작더라도 중앙은행은 경제의 시동을 다시 켤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버냉키는 이를 실천하지 않았다. 연준과 다른 많은 중앙은행이 금융위기 충격을 상쇄하는 데 필요하다고 이코노미스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찍어냈지만 경제는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버냉키는 미국 본원통화 규모를 8000억달러에서 4조달러로 5배 늘렸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 뒤 그의 용기는 꺾였고, 본원통화를 그 두배가 넘는 9조달러로 늘리는 다음 도약을 이루지 못했다. 임기 마지막 몇 해 동안 버냉키는 의회에 재정확장을 촉구하는 부질없는 짓에 매달렸다.

뭐가 잘못됐던 걸까. 답은 흔히 그렇듯 어떤 이코노미스트에게 묻느냐에 따라 다르다. 내가 버냉키를 제대로 이해한 게 맞다면, 그는 아마도 근본적으로 잘못된 건 없으며 일시적인 과도한 저축으로 인해 공격적 통화확장이 온전히 경기회복으로 이어지는 게 지체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손실을 꺼리는 국부펀드와 신흥시장 백만장자들이 돈을 미국과 유럽에 박아두고, 각국 정부가 운신 폭을 넓히기 위한 정책을 추구하면서 완전한 회복을 보장하는 금리 수준이 크게 떨어졌고, 충격이 사라지는 데 걸리는 시간도 길어졌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버드대의 케네스 로고프는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버냉키의 최대 실책은 정책의 초점을 통화공급에만 국한했다는 것이다. 간단한 경제모델에 따르면 자본시장이 완전한 균형 상태에 있으면 채권시장 역시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정부가 위험자산을 환매하고, 채권자들이 손실을 상각하도록 유도하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다. 느슨한 통화정책보다도 이 같은 방안을 동원했다면 민간지출을 끌어올리고, 급속하게 완전한 회복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었다. 반면 연준이 연 물가상승률을 2%보다 높게 책정하고,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규모만큼 QE에 나서겠다는 확고한 의지만 보였다면 통화정책 대응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여전하다. 이 같은 간단한 약속은(신뢰할 수만 있다면) 막대한 더 큰 규모의 QE보다도 훨씬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래리 서머스와 폴 크루그먼이 내놓은 가장 설득력 있고, 탁월한 네 번째 견해가 있다. 이들은 통화정책이 온전한 경기회복을 이끌 것이라는 증거는 애당초 거의 없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경제적 충격을 상쇄하기 위한 밀턴 프리드먼의 꿈같은 전략적 통화개입 활용은 그저 꿈일 뿐이다. 이는 (주로 두드러질 정도의 급속한 인구·생산성 증가라는) 지난 반세기에 걸친 미국과 유럽의 독특한 상황에 힘입어 가능했다. 크루그먼은 "아무도 인플레이션이 올 것으로 믿지 않으면 오지 않는다"면서 "물가를 확실히 끌어올리는 유일한 방법은 재정확대를 동반한 통화정책 체제 변화다"라고 지적했다.

내가 어떤 주장이 옳은지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런 논의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1930년대에 비슷한 문제로 씨름을 한 이후 거시경제학 부문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케인스의 경우 답은 명확했고, 서머스와 크루그먼이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케인스는 1936년에 "금리에 관한 (통화)정책 영향력이 그 자체로 충분할 것 같지는 않다"면서 "따라서 나는 일부 포괄적인 투자의 사회화만이 완전고용에 근접한 수준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인식하고 있다"고 썼다.
이는 행동하는 용기가 필요한 때가 왔을 때 새겨볼 가치가 있는 지적이다.

브래드포드 디롱 美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경제학 교수

정리=dympna@fnnews.com 송경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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