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사설

[fn논단] 상과 벌, 법가의 공과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1.16 16:42

수정 2015.11.16 16:42

[fn논단] 상과 벌, 법가의 공과

제자백가 중 반목이 심했던 것은 유가(儒家)와 법가(法家)였다. 진시황 시절 법가인 한비자가 유가를 바뀐 세상에도 옛것을 주장한다며 국력을 약화시키는 다섯 좀벌레의 하나로 지목했고, 이사는 유교 경전을 불사르고 유학자를 생매장시킨 '분서갱유'를 일으키기까지 했다. 때문에 유가는 두고두고 법가 사상가들을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자들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했다. 유가는 법가의 중심인물인 상앙, 이사, 한비자 모두 비참하게 죽은 것이 당연하다고 보았다. 한비자는 사약을 받고 목숨을 끊지만, 상앙은 네 마리 말에 팔 다리를 묶어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을 당했고 이사는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으로 처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법가는 춘추시대 제나라 관중을 시조로 보나 본격적인 활동은 성문법을 최초로 제정한 자산, '법경'을 저술한 이극을 거쳐 상앙에 이르러 비로소 확립되고 진나라 통일을 이룩한 이사를 거쳐 한비자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상벌에 대한 명확하고 투명한 법 규정으로 사회질서를 확립하고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어 놓은 법가, 이들은 진시황을 도와 중국 통일의 대업까지 이루었다. 어쨌든 법가는 짧은 기간 내 경제발전과 체계적인 통치를 확립시켜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역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유가도 법가 사상가는 싫어했지만 법가가 주창한 법치 자체는 치국의 중요 요소로 받아들였다. 예컨대 조선왕조는 유교 국가였지만 '경국대전'이란 법전을 만들어 나라를 다스렸다. 역사가 사마천도 사기 '상군열전'에서 상앙에 대해 "상군은 천성이 각박한 인물"이라고 폄하했지만, 그의 개혁에 대해서는 "법을 시행한 지 10년에 진나라 백성들은 크게 기뻐했다. 길바닥에 떨어진 물건도 줍는 사람이 없었고 산중에는 도적이 없어졌다.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은 만족하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법가는 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었음에도 공포와 냉혹의 나쁜 이미지를 갖게 되었을까. 한비자는 "명확한 법을 올바르게 행하고, 엄중한 형벌을 명시하여 강자는 약자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고, 다수는 소수에게 난폭하지 못하게 하며, …군주와 신하는 서로 친밀하고, 부자는 서로가 감싸주며, 뜻밖의 죽음이나 포로 신세가 되는 근심이 없어지도록 한다. 이런 것들이 최대의 공적이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는 그 도리를 알지 못하므로 오히려 법술을 가리켜 포악하다고 한다"라며 항변했다.

그 이유는 법가인 상앙과 유학자 순자의 주장을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상앙은 백성을 다스리는 데 상보다 벌이 효과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형벌을 엄하게 하고 상을 가볍게 하는 것이 군주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고… 천하 제왕이 된 나라는 형벌이 9이고 상이 1이며… 약한 나라는 상이 9이고 형벌이 1이다." 반면 유학자 순자는 "포상은 기준보다 넘치면 안되고, 형벌은 지나치게 세밀하면 안된다… 만약 지나치게 하려면 차라리 포상할지언정 과한 형벌은 주지 말라"고 했다. 유학자 중 법가사상을 널리 포용했던 순자도 이 점만큼은 명백한 차이를 보였다.


'상보다는 벌', 이 때문에 법가는 민심을 잃고 악평을 얻게 되었다. 진나라 멸망 후 주류가 된 유가는 법은 받아들였지만 상벌제는 기피하게 되었다.
순자의 주장처럼 상벌제를 '벌보다 상'인 경제적 인센티브로 받아들였다면 유교사회도 보다 활기찬 경제발전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호철 한국거래소 부이사장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