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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찬 칼럼] 한국판 저커버그 어디 없소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2.14 17:04

수정 2015.12.14 17:04

미국선 카네기·록펠러 이어 IT 갑부들 '기부천사' 변신
박애는 자본주의의 버팀목
[곽인찬 칼럼] 한국판 저커버그 어디 없소

우리 속담에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산다는 말이 있다. 추하게 번 돈을 멋지게 쓸 때 이르는 말이다. 석유왕 존 록펠러(1839~1937년)가 꼭 그랬다. 19세기 후반 스탠더드오일은 미국 석유시장을 한손에 틀어쥐었다. 경쟁사가 나타나면 가격을 덤핑하는 등 악랄한 수법으로 내쫓았다. 1904년 아이다 타벨이라는 기자가 '스탠더드오일의 역사'라는 책을 냈다.
록펠러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책은 록펠러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해 시카고대학 설립 자금을 기부했다. 그로부터 9년 뒤 록펠러재단이 정식 출범한다. 그의 나이 일흔네살 때다. 지금 록펠러는 세계적인 자선사업가로 기억된다. 말년에 회개한 덕인가, 록펠러는 98세까지 장수했다.

록펠러보다 네 살 위인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1835~1919년)는 일찌감치 자선사업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1889년 노스 아메리칸 리뷰지에 저 유명한 '부의 복음'(The Gospel of Wealth)을 발표한다. 자수성가한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천명한 글이다. 54살 때의 일이다. 카네기는 재산을 유산으로 남기지 말고 공익을 위해 재분배할 것을 제안했고 실천했다. 사후 카네기는 불멸의 자선사업가 명단에 록펠러와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한 빌 게이츠(1955~ )는 정보기술(IT) 벤처 갑부의 선두주자다. 그는 40대에 돌연 자선가로 변신했다. 그가 2000년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 설립을 발표했을 때 많은 이들이 "벌써?"라는 반응을 보였다. 자선사업은 나이 들어서, 최소한 쉰은 넘어서 하는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지금와서 보니 게이츠는 벤처뿐 아니라 자선사업에서도 천재라는 생각이 든다.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은 아프리카 등 빈국의 교육.보건.빈곤 구제에 집중한다. 재단 기금은 443억달러 규모다. 이런 좋은 일은 한시도 미룰 이유가 없다.

게이츠의 기록을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1984~ )가 기분 좋게 깨뜨렸다. 얼마전 저커버그는 첫딸을 낳은 기념으로 자신이 소유한 페이스북 주식의 99%를 내놓겠다고 약속했다. 재단 이름은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로 정했다. 종잣돈은 우리 돈 52조원으로 게이츠 재단과 맞먹는다.

저커버그는 올해 서른한살이다. 우리 같으면 이제 겨우 취직해서 진동한동 뛰어다닐 때다.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거의 전 재산을 기부할 생각을 했는지 참 용하다. 딸 맥스에게 보내는 편지(A Letter to Our Daughter)에 저커버그의 철학이 담겨 있다. 요약하면 "네가 우리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벤처 기업인이 아니라 철학자 저커버그를 보는 느낌이다. 영어의 자선(Philanthropy)은 인류애를 뜻한다. 철학(Philosophy)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선과 철학은 뿌리가 같다.

저커버그의 편지는 21세기판 '부의 복음'이다. 미국의 참 부자들은 자기 재산이라고 제멋대로 쓰지 않는다. 기독교 윤리의 영향일까. 성경은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권한다. 큰 창고에 곡식을 꼭꼭 채워둔 부자에게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고 경고한다. 수중에 재산이 있을 때 슬기롭게 쓰란 얘기다. 미국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힘이 여기서 나온다.

한국엔 전 재산을 내놓은 김밥 할머니는 있어도 록펠러.카네기.게이츠.저커버그는 없다. 우리 창업자들은 상속에 집착한 나머지 인류애를 발휘할 기회를 놓쳤다. 우리 기업과 기업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데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텔로스(Telos)라는 잣대로 정의를 가늠한다. 텔로스는 목적, 존재이유를 뜻한다.
기업의 텔로스는 무엇인가. 이윤창출에 그치면 좋은 기업이다. 한발 더 나아가 인류애를 추구하면 위대한 기업으로 존경받고 길이 이름을 남긴다.
한국판 저커버그의 출현을 갈망한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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