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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희망을 버린 희망퇴직

파이낸셜뉴스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2.23 17:37

수정 2015.12.23 21:44

2030세대에 닥친 감원 한파 기업 핵심가치·정체성 흔들어
경쟁력 강화에 도움될지 의문
[이재훈 칼럼] 희망을 버린 희망퇴직

건설장비업체인 두산인프라코어가 20대 신입사원까지 희망퇴직 대상에 올렸다는 소식은 충격이자 실망이었다. '사람이 미래다'라는 두산의 슬로건은 단지 듣기 좋으라고 만든 광고용 카피가 아니다. 두산 구성원들이 오랫동안 공유해온 기업철학이다. 회사의 미래를 짊어진 2030세대의 사원.대리급 직원을 쳐낸다는 것은 회사 스스로가 핵심가치를 부정하는 행위다.

두산인프라코어의 사정이 너무나 어려워 인력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점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됐다.
회사는 중국 경제침체로 건설경기가 곤두박질치면서 올 3.4분기까지 2500억원의 적자를 냈고 앞으로도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태다. 그래서 올 들어 세번이나 희망퇴직을 실시했고 830명이 나갔다. 미흡하다고 본 두산은 사무직 3000명 중 40%를 감원한다는 목표 아래 이달 또다시 희망퇴직 공고를 냈다. 회사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앞선 두 차례의 사무직 명퇴 때 과장급 이상 고참 직원은 거의 걸러졌고 인원을 채우려다보니 이번에는 대리급 이하가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귀띔했다.

말이 희망퇴직이지 젊은 직원에 대한 '찍퇴(찍어서 퇴직)'였다. 요즘 같은 취업난 시대에 대리급 이하 직원들에게 퇴직은 청천벽력과도 같다. 경력직으로 재취업할 수 없으니 노량진 학원가에 가서 '공시족'이 되거나 대학원 입학을 알아볼 수밖에 없다. '미생'을 벗어나나 했더니 졸지에 '사석'이 되어버린 꼴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명퇴가 미래다' '구조조정이 미래다'라는 조롱과 비난이 난무했다. 다급해진 박용만 두산 회장이 "신입사원은 제외하라"고 지시했지만 1~2년차 직원만 구제됐을 뿐 3~5년차 직원은 더 큰 피해를 봤다. 그렇게 다시 702명이 나가야 했다.

여기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새삼 강조할 생각은 없다. 다만 두산의 경우 자가당착에 빠졌다는 점이 우려될 뿐이다. 7년 전 두산이 글로벌 장비업체인 밥캣 인수합병(M&A)을 마무리한 후 박 회장을 4시간에 걸쳐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당시 박 회장은 기업철학인 '두산웨이'를 설파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두산은 소비재(술)에서 중공업으로 사업포트폴리오를 바꿨고 외국기업도 여럿 인수했다. 이런 급격한 변화에도 사람만 남아있으면, 환경에 적응하는 인재만 있으면 기업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인재 양성, 따뜻한 성과주의를 골자로 한 '두산웨이'는 한마디로 사람과 기업이 함께 성장하자는 뜻이다." 10여년간 이런 핵심가치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두산 직원들은 작금의 사태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조직 정체성에는 어떤 혼란이 닥칠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세밑의 재계에는 살을 에는 감원의 칼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다. 올해는 조선, 해운, 철강, 건설 등 업종을 가리지 않고 있고 직위도 20.30대로 확산되고 있다. STX조선해양, 한국GM 등은 하위직급까지 감원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만큼 우리 기업들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려있다는 뜻이다.

개중에는 내년 경제를 심각하게 보고 선제적 구조조정에 나선 대기업도 많다.
내년 정년 60세 연장을 앞두고 기업들이 청년층을 자르고 나선 것은 아무리 봐도 아이러니다. 대기업들은 정부의 '청년일자리 20만+프로젝트'에 호응한다며 내후년까지 16만명을 채용하겠다고 다짐했고 청년희망펀드에 수십억~수백억원을 내놓지 않았던가. 이런 게 결국 아무 소용없다는 뜻 아니겠나.

그러나 기업들이 이것만은 잊지 말았으면 한다.
감원만으로 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는 없다는 점, 그리고 인재 양성은 기업 최고의 투자라는 점이다. 비용 좀 아끼겠다고 젊은 인재들을 줄줄이 잘라내고 나면 그 기업에 무슨 미래와 희망이 남겠나.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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