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한국이 싫다면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5.12.28 17:42

수정 2015.12.28 17:42

선거철마다 청년층 호객, 입 다물고 있으면 '호갱'
4월 총선서 제 목소리 내야
[곽인찬 칼럼] 한국이 싫다면

어네스트 헤밍웨이는 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잃어버린 세대'를 말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삶의 목표를 잃고 보헤미안처럼 떠도는 젊은 예술가들을 헤밍웨이는 그렇게 불렀다. 21세기 스페인에도 '잃어버린 세대'가 있다. 스페인의 청년실업률은 50%에 육박한다. 둘 중 하나는 실업자다. 이들의 분노가 지난주 총선에서 폭발했다.
청년들은 기성 정당을 버리고 신생 포데모스(Podemos.우린 할 수 있다)와 시우다다노스(Ciudadanos.시민들)에 몰표를 던졌다. 둘 다 30대 젊은 당수가 이끄는 정당이다. 그 결과 수십년 만에 국민.사회 양당체제가 무너졌다.

총선(20일.현지시간) 사흘 전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국민당)가 성난 청년으로부터 주먹세례를 받은 일도 있었다. 17세 청년은 잡혀가면서도 활짝 웃는 얼굴로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청년은 "나는 월급 통장이 하나도 없는데 총리는 두 개를 받는다고 해서 때렸다"고 말했다. 총리를 비롯해 집권 국민당 실력자들은 건축업자로부터 비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에 휩싸여 있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스페인의 오늘이 이렇다.

한국은 분명 스페인과 다르다. 금융.재정위기도 비교적 쉽게 지나갔다. 상대적으로 성장률도 괜찮다. 무디스 등 신용평가사들은 오히려 한국의 신용등급을 올렸다. 청년실업률도 스페인과 비교하면 한참 아래다. 11월 기준 통계청 공식 숫자는 8% 수준이다. 취업준비생 등 사실상 실업자를 고려한 체감실업률은 10%대로 집계됐다. 민간연구소 수치는 22%(한국경제연구원 1~8월 추계)까지 높아지지만 그래도 스페인에 비하면 한참 낮다.

수치가 낮으니 안심해도 될까. 큰일 날 소리다. 주위 청년 열 명 중 둘이 일자리가 없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일이 있어도 비정규직으로 허드렛일이나 하는 청년이 수두룩하다.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서울대생은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전두엽 색깔이 아닌 수저 색깔"이라는 유서를 남겼다. (금)전두엽은 뛰어난 머리를 말한다. 머리가 좋아도 돈 많은 부모를 만나느니만 못하다는 뜻으로 읽힌다. '노오력'만 하면 얼마든지 팔자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건 해법이 아니다. "먼저 태어난 자,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논리에 굴복하는 것이 이 사회의 합리"라고 청년은 절규한다.

올해 읽은 책 가운데 소설가 장강명이 쓴 '한국이 싫어서'가 기억에 남는다. 제목은 비애국적이지만 곱씹을 대목이 많다. 한국이 싫어서 호주로 떠난 '계나'가 주인공이다. 계나의 눈에 비친 2015년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래서 계나는 한국이 싫다. "명문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집도 지지리 가난하고, 그렇다고 내가 김태희처럼 생긴 것도 아니고. 나 이대로 한국에서 계속 살면 나중에 지하철 돌아다니면서 폐지 주워야 돼."

4.13 총선이 넉달도 채 안 남았다. 정치인들이 청년들을 호객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스페인 청년들은 제 목소리를 냈다. 이제 한국 차례다. 입 다물고 가만 있으면 선거철마다 '호갱'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이민은 근본 해법이 아니다. 한국이 싫으면 한국에 남아서 한국을 바꿔야 한다.

이기권 고용부 장관은 지난주 기자들에게 "노동개혁 5법을 입법한 뒤 비정규직의 비중이 줄고 처우가 개선된다는 것에 장관직을 걸겠다"고 말했다. 반면 새정치민주연합의 이목희 정책위의장은 "기간제법.파견법은 희대의 악법으로 절대 수용불가"라고 말했다. 누가 옳은지 청년 유권자들이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정치인들이 다신 얕잡아 보지 못한다.
'헬조선'의 굴레는 오직 청년만이 깨뜨릴 수 있다. 2016년 대한민국 변화의 키는 청년이 쥐고 있다.
스페인에서 보듯 그 시작은 투표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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