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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알린 이수광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1.18 17:13

수정 2016.01.31 13:45

[fn논단]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알린 이수광

1592년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불과 20일 만에 수도 한양을 점령하고 2개월 만에 평양성까지 함락시켰다. 의주로 피란 간 선조는 명나라의 원군, 이순신 장군의 승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등에 힘입어 간신히 전란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왜란이 끝난 뒤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은 "지난일을 징계하여 뒷날의 근심을 그치게 한다"는 시경의 글귀를 따와 '징비록(懲毖錄)'을 썼다. 그가 쓴 7년의 전란 기록 곳곳에는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뼈저린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조선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데는 서양 신무기 조총의 위력이 컸다. 일본은 1543년 중국으로 가던 포르투갈 선박 한 척이 규슈에 표류했을 때 배운 총포 제조법으로 생산공장을 세워 군대를 무장시켰던 것이다.
세상은 이미 변해 있었다. 유럽은 선박과 항해술의 발달로 아시아와 교역범위를 넓히고 있었으며 중국, 일본 등은 이를 통해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며 변화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여전히 세계와 담을 쌓고 있었다.

이 무렵, 넓은 세상의 다양한 정보를 조선에 소개하고자 했던 선각자가 있었다. 지봉 이수광이었다. 그는 왕족의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23세 약관의 나이에 대과에 급제해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가 서른이 되던 해 임진왜란이 발발해 전쟁의 참상을 겪어야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광해군의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자 그는 당색을 멀리하기 위해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책을 썼다.

그는 임진왜란 직전과 왜란 중 그리고 광해군 3년, 세 차례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다른 나라 사신들과 친교를 맺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런 경험과 평생 수집한 국내외의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백과전서류의 '지봉유설'를 편찬한 것이다. 20권 10책의 방대한 이 책에는 경학, 시문 외에 천문, 지리부터 곤충, 초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이 망라돼 있다.

유학자 이수광은 고담준론에 갇혀 있는 조선 선비의 지식의 틀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혹독한 전란을 겪었다면 성리학과 중화사상에 머물지 말고 사고범위를 유용한 실생활 정보로 확장시키고 시각을 세계로 넓혀야 한다. 그래서 그의 책 제국부 외국조에는 세계 50여개국의 문화와 역사를 소개했다. 중국을 벗어나 안남(베트남), 진랍국(캄보디아)으로부터 시작해 회회국(아라비아), 불랑기국(포르투갈), 대서국(이탈리아) 등 이슬람과 유럽 기독교 문화권의 나라들에 대한 정보까지 기술했다. 또 처음으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쓴 천주교 교리서 '천주실의'를 소개하고, 마테오 리치가 만든 곤여만국전도가 조선에 전해졌다는 사실도 밝혔다. 중국 바깥의 세상을 전혀 몰랐던 조선 선비에게 유럽 등 5대륙의 여러 나라를 그린 곤여만국전도는 큰 충격이었다.

세계가 긴 잠에서 깨어나던 17세기, 조선은 유성룡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한 채 왜란에 이어 두 차례 호란을 겪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두 차례 옥사, 인조반정, 이괄의 난 등 당쟁마저 이어졌다.
이수광은 짧은 중국 체류기간에도 부지런히 사람을 만나고 자료를 수집해 꼼꼼히 출처를 명시해 가며 방대한 자료를 정리했다. 조선이 스스로 강해지려면 정신 차려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여기서 실학이 출발하게 되었다.

이호철 한국IR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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