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이구순의 느린 걸음] 우물 안 개구리

파이낸셜뉴스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2.03 16:43

수정 2016.02.03 16:43

[이구순의 느린 걸음] 우물 안 개구리

요즘 주변 사람들과 만나면 대화의 주제가 두 가지로 극명하게 갈린다.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알파고가 이세돌 9단에게 도전장을 낸 것을 시작으로 로봇과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 정보통신기술(ICT)이 가져올 삶과 산업의 변화. 애플의 시가총액을 뛰어넘은 구글의 저력…. 이런 뜬구름 잡는 화제가 하나다. 대화의 끝은 늘 "이게 먼 미래 얘기가 아니야. 지금 진행되고 있는 변화야!"다. 다른 화제는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합병(M&A) 얘기다. 인수하면 된다, 안 된다 의견도 엇갈리고 논쟁도 제법 뜨겁다. 그런데 이 얘기는 통신회사 사람들을 만날 때뿐이다.
인공지능 얘기하던 자리에서 "SK텔레콤이 CJ헬로비전 인수하는 문제는 말야…" 하고 말이라도 꺼낼라 치면 분위기가 '싸~'해진다. 관심 없단다.

최근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두 가지 인수합병이 있다. 하나는 CJ헬로비전이고, 하나는 로엔엔터테인먼트다. 케이블TV 가입자 415만명이 있고, 전국 주요 도시 곳곳에 케이블TV망과 초고속인터넷망을 가진 CJ헬로비전의 몸값은 1조원이다.

음악서비스를 제공하는 멜론이 있지만 멜론 이용자는 언제라도 가입하고 탈퇴할 수 있어 어찌 보면 하루가 불안한 이용자들만 갖고 있는 로엔엔터테인먼트의 판매가격은 1조8700억원이다. 꽤 오랫동안 ICT 분야를 취재하고 기사를 쓰며 ICT 동네 돌아가는 이치는 좀 안다고 생각해 온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가치다.

내가 아는 ICT 동네 셈법대로라면 약정으로 묶어둔 가입자가 있고, 가입자를 엮는 인프라를 가진 CJ헬로비전이 로엔엔터테인먼트보다 가치가 높아야 한다. 그런데 시장은 내 상식이 틀렸다고 지적한다.

옛 기억을 더듬어보면 두루넷이라는 초고속인터넷 회사가 1조2500억원에 팔린 일이 있다. 당시 두루넷 가입자는 달랑 92만명이었다. 무려 11년 전 일이다. 세상이 인정하는 가치가 이렇게 변했구나 싶다.

통신망 한 줄 없이도, 묶어둔 가입자 한 명 없이도 구글이 세계 2위 스마트폰 회사인 애플보다 더 비싼 몸값을 인정받는 게 지금 세상인 것이다. 요즘 통신업체 사람들은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M&A 결과가 통신산업의 판을 뒤흔들어 놓는다고 야단을 부린다. 통신업체 죽고 사는 일이 M&A에 따라 판가름될 것처럼 법석이다.

'입장(立場).' 글자대로 풀이하면 선 자리라는 말이다. 선 자리에 따라 보이는 것도 다르다. 선 자리가 우물 안이면 바깥 세상을 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세상 돌아가는 것과 벽을 쌓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2016년 세상은 통신망 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줄 없이도, 굳이 묶어두지 않아도 이용자를 빨아들이는 서비스의 가치를 더 쳐준다.
통신산업의 판을 뒤흔들고 통신업체의 사활을 결정할 일은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M&A가 아니라 통신업체들이 이용자들을 빨아들일 서비스를 준비하지 못한 채 약정으로 가입자 묶어두는 데 안주하고 있는 현실 아닐까.

M&A 찬반에 사활을 걸기보다는 이용자가 스스로 찾아오는 서비스를 찾고 만드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통신회사들이 선 자리가 우물 안이 아니기를 바란다.

cafe9@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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