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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주영 칼럼] 한국판 '잃어버린 20년' 오나

염주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3.14 17:18

수정 2016.03.14 17:19

소비 위기 20년전 일본과 닮아 인구구조 맞물려 탈출구 안보여
재산상속 이젠 미덕일 수 없어
[염주영 칼럼] 한국판 '잃어버린 20년' 오나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소비위축에서 시작됐다. 1992년의 버블 붕괴 이후 일본인의 평균소비성향은 6년 연속 하락했으며 결국 1998년에 마이너스 성장(-0.3%)을 기록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흡사한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증상이 일본보다 중증이다. 2010~2015년 5년 연속 소비성향이 하락했다. 하락 속도가 일본보다 두 배나 빠르다. 일본은 1992~1998년 사이에 소비성향이 연평균 0.55%포인트씩 낮아진 데 비해 우리는 연평균 1.08%포인트씩 하락하고 있다.
한국판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의문을 낳기에 충분하다.

소비위축은 우리 경제를 좀먹는 요인으로 등장했다. 지난해 가계의 소비지출은 0.5% 증가했는데 물가상승을 감안하면 실질 소비지출은 마이너스 0.2%에 불과하다. 이런 소비위축이 앞으로도 상당 기간은 지속될 것 같다. 소비위축이 경기적 요인이 아니라 인구구조 변화와 맞물려 있어 그렇다. 변화의 핵심은 고령화와 인구감소, 베이비부머의 은퇴 등 세 가지로 요약된다. 공교롭게도 세 가지가 모두 소비에는 쥐약이다.

노인이 되면 소비욕구는 감퇴되기 마련이다. 젊은이들에 비해 돈을 잘 쓰지 않는다는 얘기다. 벌이가 끊겨서도 그렇지만 설혹 벌이가 있거나 재산이 많은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노인세대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 그래서인지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있다. 통계를 봐도 알 수 있다. 지난해 60대 이상 노년층 가구의 소비성향은 67.5%로 40대 가구(75.5%)보다 8%포인트나 낮았다. 지난 10년간의 추이를 봐도 40대 가구의 소비성향은 4.1%포인트가 낮아졌는데 60대 이상 가구는 11.2%포인트나 낮아졌다. 노년층의 소비위축 속도가 매우 빨라서 앞으로 노인인구 비율이 높아질수록 소비위축은 더욱 심화될 것이 분명하다.

인구 감소는 직접적으로 소비를 위축시키는 요인이다. 일본은 이미 총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아직 그 단계는 아니지만 그런 상황을 예고하는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핵심생산가능인구(25~49세)는 2010년부터 줄고 있고 생산가능인구(15~64세)도 내년부터 감소한다. 이들의 감소는 소비 감소로 이어질 게 분명하다.

700여만명에 달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시작된 것도 소비를 짓누르는 요인이다. 베이비붐 세대는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 신화를 만들었으며 그 혜택을 가장 많이 누렸다. 이들에게도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성장 시대를 사는 지금의 젊은 세대와 비교하면 훨씬 수월하게 한재산 모을 수 있는 시대를 살았다. 이들의 은퇴는 부자 노인세대의 탄생을 의미한다. 달리 표현하면 큰손들이 소비의 주무대에서 집단 퇴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 상당 기간 소비위축이 개선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고령화가 진행되면 노후 대비에 많은 돈이 들어간다. 노인들이 벌이는 없으면서 소비만 하는 것이 경제에 부담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진짜 무서운 것은 그 반대다. 노인들이 소비한다는 점이 아니라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령화→복지수요 증가→국가재정 악화'라는 과정보다 '고령화→소비위축→저성장 고착화' 과정이 훨씬 심각한 문제다. 소비가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를 넘는다. 소비위축을 해결하지 않는 한 경제성장이 원활하게 이뤄지기를 기대하기는 무리다. 고령화를 복지수요 증가 측면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소비.성장 기반의 붕괴라는 측면을 더 유의해서 봐야 한다.


내년부터 생산가능인구 감소가 시작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섬뜩하다. 일본에서 생산가능인구 감소가 시작된 해가 1995년인데, 일본이 '잃어버린 20년'에 들어선 때도 그 무렵이었다.
우리 경제는 지금 사활이 걸린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y1983010@fnnews.com 염주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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