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이구순의 느린 걸음] 알파고는 구글 혼자 만든게 아니다

이구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3.16 17:01

수정 2016.03.16 21:52

[이구순의 느린 걸음] 알파고는 구글 혼자 만든게 아니다

한껏 흥분했던 일주일이 끝났다. 감동적으로 연출된 훌륭한 '쇼'를 전 세계가 즐겼다.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AI) 프로그램 알파고의 바둑 경기 얘기다. 식당이든 카페든, 인공지능에 대해 알든 모르든, 두세 명만 모이면 알파고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많은 사람이 흥분한 듯하다.

알파고가 부럽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는데, 그래도 부럽다.
기자 생활을 시작할 무렵 IBM이라는 큰 회사가 세계 컴퓨터업계를 쥐락펴락했었다. 그 뒤 마이크로소프트라는 회사가 '윈도'라는 컴퓨터 운영체제(OS)로 세계를 장악했다. 그리고 구글과 애플, 줄줄이 외국 대형 업체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래도 부럽지는 않았다.

그저 덩치가 큰 회사라고 생각했다. 시장 규모가 크고 기업의 덩치가 크니 주도권을 잡은 것일 뿐 우리 기업들도 못할 것 없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럽다. 이번에 본 구글은 단지 큰 회사가 아니었다. 우리 기업들은 가질 수 없는 풍요로운 환경을 가진 덕에 차원이 다른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구글이 부럽다. 부러운 것 하나는 '알파고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글 딥마인드의 최고경영자(CEO) 데미스 허사비스가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이다. 허사비스는 게임에 빠진 학생이었다고 한다. 요즘 우스갯소리로 허사비스가 한국에서 났더라면 게임 하다 부모에게 욕먹고, 매맞고 결국 비뚤어져 '게임중독자'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힌 백수가 됐을 거라는 얘길 듣곤 한다. 허사비스가 좋아하는 게임을 즐기다 게임을 개발할 수 있게 되고, 알파고까지 만드는 사람이 되도록 해주는 교육시스템, 사회적 환경이 부럽다.

또 하나 부러운 것은 33조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인공지능 개발에 쏟아부을 수 있는 구글의 결단이다. 인공지능이 미래의 시장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예상은 있었지만, 인공지능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결국 무서운 존재로 만들어 전 세계에 자랑하게 되는 미래예측 능력, 집요한 추진력이 알파고를 만들었다.

국내 어떤 CEO가 '언젠가 시장이 열릴지도 모르는' 미래기술에 막대한 자금을 들여 10년 이상 투자하겠다고 선언한다면, 십중팔구 이 CEO는 임기와 관계없이 '정신없는 CEO'로 찍혀 백수가 됐을 게 틀림없다. 알파고는 구글 혼자 힘으로 만든 게 아닌 듯싶다. 교육, 사회문화, 경영 체질 같은 풍요로운 환경이 뒷받침해줬기 때문에 탄생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이 9단과 알파고의 바둑 경기 이후 기업들은 물론 정부, 정치권까지 온통 인공지능에 꽂혔다. 서로 정책을 만들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인공지능 정책이 아니다.
교육, 사회문화, 경영 체질 같은 환경을 바꿔줘야 한다. 지금도 PC방 구석에 숨어있을 미래의 허사비스들이 자기 특기를 살릴 수 있도록 말이다.
개발하고 싶은 새 기술을 찾고도 장기적으로 투자하겠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CEO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말이다.

cafe9@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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