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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주영 칼럼] 일자리가 계급이어선 안된다

염주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3.28 17:05

수정 2016.03.28 17:05

꿈·희망·도전서 멀어지고 포기·계급·분노와 가까워져
청년의 불행은 국가의 불행
[염주영 칼럼] 일자리가 계급이어선 안된다

만약 나에게 지금 청년으로 돌아가 대한민국에서 다시 살 기회가 주어진다면 행복할까.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대학을 나와도 몇 년씩 취업문을 두드려야 하고, 자기소개서를 백 장 넘게 썼지만 어느 한 군데서도 응답을 듣지 못하는 현실이 떠올라서다.

요즘 대학생들은 될 수만 있으면 졸업을 미루려 한다.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섣불리 졸업하고서 '취준생'으로 떠도는 것보다는 학생 신분을 유지하는 것이 취업에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어학연수에다 휴학 한두 학기는 기본이다.
어려운 형편에 비싼 등록금을 더 내야 하지만 졸업을 1~2년 늦추는 것이 다반사다.

얼마 전 TV에서 지난 2년 동안 자소서를 백 장 넘게 썼다는 어느 취준생의 일상을 접할 수 있었다. 고시원이나 쪽방에 머물며 취업 준비를 계속하는 동안 2~3년이 후딱 지나갔다. 더 이상 고향의 부모님께 손을 내밀 수도 없었다. 여기저기 닥치는 대로 일용직 알바를 했다. 어쩌면 이대로 청춘을 기약 없이 보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아흔아홉 번째 시도가 실패해 백 번째 자소서를 써야 했을 때 이 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어떠 했을지 궁금하다.

청년실업률이 지난달 12.5%로 치솟았다. 구직 단념자 등 구직활동을 하지 않아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실상의 실업자까지 포함하면 실제로는 20%를 넘는다. 이들이 취준생이다.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 취업은 못하고 준비만 하는 청년들, 좀 더 나가면 어디서도 쓰임을 인정받지 못한 청년들까지 다양하다. 요즘에는 취준생들이 스스로를 '잉여인간'이라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쓸모 있는 사람들을 뺀 나머지란 의미다. 우리 사회에 대한 강한 분노가 느껴져 섬뜩하다.

청년들이 취업의 문턱을 넘어서더라도 바로 행복한 삶이 찾아오는 건 아니다. 그들은 신분 변동이 거의 불가능한 계급사회로 들어선 것이나 다름없다. 청년들의 일자리에 명확한 계급 구분이 생겼다. 취업한 기업의 규모와 고용 형태에 따라 4개로 나뉜다. 그 중에 최상위는 대기업.정규직이다. 그 밑에 순서대로 중소기업.정규직, 비정규직, 취준생이 있다. 대기업.정규직은 월급이 한 단계 밑인 중소기업.정규직의 두 배, 두 단계 아래인 비정규직보다는 세 배나 된다.

청년들이 각 계급에 취업하는 비율은 매년 거의 일정한 패턴을 보인다. 청년 10명 중 한 명만이 대기업.정규직에 취업된다. 그 다음은 중소기업.정규직에 4명, 비정규직에 3명씩이 배분된다. 나머지 2명은 취준생으로 남는다. 계급별로 1대 4대 3대 2의 비율은 엄격히 유지된다. 각 계급마다 두터운 칸막이로 둘러쌓여 있어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에서 대기업이나 정규직으로의 이동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일단 중소기업에 발을 들여놓으면 대기업 꿈은 접어야 하고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이 되기 십상이다. 우리 사회는 계층 간 이동 가능성, 즉 모빌리티가 부족한 사회로 변해가고 있다. '흙수저론'이 유행하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경제가 어렵지만 생각을 바꾸면 청년일자리를 늘릴 여지가 있다. 계층 간 이동 가능성을 높여주면 적지 않은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계층 간 이동 가능성을 달리 표현하면 고용구조의 유연성이다. 기업인들이 될 수 있으면 사람을 필요한 것보다 적게 뽑으려 하는 것은 불경기가 닥쳤을 때에 대한 걱정 때문이다. 고용 규모를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면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쉬운 해고'가 누군가에게 불행이 될 수 있지만 뒤집어보면 근로자 전체에는 행복이 될 수 있다. 특히 취업난에 시달리는 청년들의 일자리 기회를 늘릴 수 있다. 일자리 계급 간 칸막이도 마찬가지다.
그 칸막이를 치우면 청년들의 취업 준비기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 청년들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거의 10년전쟁을 치러야 하는 나라를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일자리가 계급이 돼서는 안 된다.

y1983010@fnnews.com 염주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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