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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표 찍는 게 고역이다

이재훈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3.30 16:57

수정 2016.03.30 16:57

파행공천·부실공약 분탕질에 유권자는 "누구를 뽑으라고.. "
투표율 역대 최저 떨어질 수도
[이재훈 칼럼] 표 찍는 게 고역이다

4.13 총선에서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대학생 딸애가 엊그제 내게 SOS(구조신호)를 쳤다. "지지할 후보와 정당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하소연이었다. 딸애도 인물과 정당의 정책.공약을 보고 뽑아야 한다는 '원론'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뉴스를 자주 검색해보고 각당의 공약도 찾아봤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야 각당은 막장 공천, 계파 전쟁으로 볼썽사나운 모습만 연출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공천받은 후보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지만 믿음 자체가 없어졌다고 했다.
각당이 내건 공약은 비슷해서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또래 친구들에게 선거는 '다른 나라' 일이라고 했다. 선거 얘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주권을 포기하는 것은 민주시민임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어온지라 어찌 됐건 투표는 해야 한다는 다짐을 해둔 터였다. 나는 딸애에게 아무 조언도 해주지 못했다. 딸애는 "원래 유권자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 건가"라고 탄식했다.

여야가 공천 과정에서 드러낸 극심한 내홍으로 정치혐오가 확산되고 있다. 한심한 쌈박질에 정치권은 이제 꼴도 보기 싫다는 반응이 많다. 며칠 전 저녁모임에 갔더니 30년 넘게 새누리당 등 보수 진영만 지지해온 TK(대구.경북) 출신 지인이 "이번엔 투표장에 안 가겠다"고 밝혔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근혜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른 유승민 의원을 비판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 공천 과정을 보니 박 대통령과 친박(親朴)의 오만과 뻔뻔함이 도를 넘은 것 같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그렇다고 진보 진영을 찍을 수는 없으니 기권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여기에 평소 야당을 밀어온 지인이 거들었다. 자신도 비례대표 공천 과정에서 벌어진 이전투구는 물론 당 정체성과 관련한 김종인 비대위 대표와 문재인 전 대표 간의 의견 충돌을 보고서 더불어민주당의 실체를 의심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이번 총선에서 무당파뿐 아니라 여야 고정 지지층의 이탈 가능성이 보인다.

여야의 공천은 막장이고 공약은 날림.재탕에 포퓰리즘이다. 기업 U턴과 관광 활성화로 일자리 200만개를 만들겠다는 새누리의 공약은 기존 정책의 재활용인 데다 허황됐다. 더민주는 기초연금 30만원 상향, 청년할당제를 통한 일자리 70만개 창출, 국민연금의 공공분야 투자 등 실현되기 어려운 공약을 쏟아냈다. 이번 총선이 공약.이슈가 없는 선거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다. 국정 운영을 제대로 못한 여당이 '야당심판론'을 내걸고 국정의 발목을 잡아온 야당이 '경제심판론'으로 응수한 것은 어이가 없다.

정치혐오는 무관심과 외면, 결국 투표 포기로 이어진다. 최근 동아일보 여론조사에서 유권자의 38%가 찍을 후보를 정하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대구.경북에서는 여당 공천 내홍에 질렸다는 반응이 많고, 야당 텃밭인 호남에서는 더민주와 국민의당으로 갈라진 야당 모습에 이맛살을 찌푸린다. 20대 총선이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할 것이란 예상이 나올 만도 하다.

19대 국회는 최악의 국회로 평가받고 있다. 유권자는 당연히 표로 심판해야 한다. 투표를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말도 맞다. 프랑스 정치철학자인 알렉시 토크빌은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했다. 정치권의 수준은 국민 수준이 좌우한다는 뜻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투표하지 않는) 정치혐오는 정치인들의 기득권을 보호해주는 철벽"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심판할 사람이 너무 많고 선택할 사람은 없어서 문제다. 불량품만 잔뜩 진열해놓고 소비자에게 무조건 하나를 고르라고 강요하는 꼴이다. 차선 또는 차악의 선택 또한 쉽지가 않다.
못 고르겠다고 하니 어떤 이는 당신들이 제대로 심판하지 않아서 정치권이 그렇게 분탕질하는 것이라고 꾸짖는다. 유권자가 무슨 죄인가. 미친 정치, 미친 선거 때문에 유권자도 미칠 지경이다.
20대 국회도 싹수가 노랗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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