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 칼럼] 선거판에 등장한 '한은'

김규성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3.31 16:47

수정 2016.03.31 16:47

[데스크 칼럼] 선거판에 등장한 '한은'

한국은행은 최근 몇 년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기준금리를 결정하고 통화를 공급하는 막강한 힘을 가졌지만 정책 영향력이 예전만 못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2011년 유럽 재정위기, 2013년 일본의 양적완화 등 대외변수가 잇따라 글로벌 경제를 옥죄자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 유럽중앙은행(ECB), 일본은행(BOJ) 등이 뉴스의 중심이 됐다. 마이너스 정책금리 등 각종 통화완화책도 이들이 주도했다. 경제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 기축통화국이 아닌 한국의 한계, 높은 자본시장 개방도 등으로 한은의 정책결정 여지는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시장은 미국 연준의 금융통화위원회 격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위원들을 '매파(물가안정에 중점을 두는 통화정책결정론자)' '비둘기파(경기부양에 방점을 찍는 통화정책결정론자)'로 곧잘 분류했지만 한은 금통위원들에 대한 세세한 성향 분석에는 관심이 덜했다.
내달부터 금통위원 4명이 바뀐다는 게 가장 큰 관심사였다.

한은이 '4·13 총선' 선거판에 등장했다. 연간 3% 경제성장도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자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이 '한국판 양적완화' 카드를 꺼냈기 때문이다. 강봉균 새누리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돈이 제대로 돌지 않고 있는 '돈맥경화' 기업 현장에 한은이 바로 유동성을 공급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는 선거공약을 제시,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금리인하만으론 도저히 경기 흐름을 성장세로 바꿀 수 없어 한은의 발권력으로 주택담보대출증권, 산은채 등을 인수하게 하자는 게 핵심이다. '한국판'이란 수식어에서 보듯 BOJ, ECB 등도 채권매입을 통한 유동성 공급정책을 펴고 있다.

하지만 총선이라는 정치적 이벤트에서 돌출돼 나온 한국판 양적완화는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여럿 있다. 우선 주요국 중앙은행들 대부분이 성장을 위해 금리인하, 발권력 등의 힘을 보탰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돈을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모든 중앙은행들의 고민이다. 심지어 금리를 마이너스로까지 만들어도 자금수요는 없다. 기업이 투자에 나서지 않고 있어서다. 돈을 쏟아부었지만 성장률은 제자리걸음이다. 좋은 일자리 숫자 역시 늘지 않고 있다. 이웃 일본이 '딜레마'에 빠진 사례다.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한 유동성 공급이 갖는 의미도 되새겨봐야 한다. 발권력은 국민을 담보로 한 대출이다. 한은이 산업은행, 시중은행 등의 채권을 사게 되면 정부가 법적으로 보증을 서야 한다. 국가채무는 는다. 쌓인 채무는 결국 국민 세금이다. 비기축통화국인 한국의 돈풀기는 인플레 압력을 높일 수 있다. 원화가치를 급락시켜 자본유출 확대라는 부작용도 낳을 수 있다.

물론, 한은의 정책수단인 금리인하가 경기를 자극할 가능성이 의문시되는 상황에서 선제적, 자극적 조치가 필요하다. 역발상도 나쁘진 않다. 다만 집권여당의 양적완화 공약은 정책당사자인 한은, 나아가 정부와 논의조차 거치지 않고 뜬금없이 급조돼 나왔다는 것에 주목한다. 표로 연결시키기엔 돈풀기만큼 좋은 공약도 없다는 생각이 배경으로 보인다. 단순한 돈풀기로는 구조적·장기적 침체의 터널 입구에 있는 경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총선이 아무리 급해도 경제 재도약을 위한 근본적인 구조개혁정책을 차근차근 진행시켜야 한다. 경쟁력을 잃은 업종의 비중을 줄이고 신성장동력을 발굴해야 한다.
한계기업 정리도 시급하다. 구조조정을 지연시키는 규제도 과감하게 완화 또는 폐지해야 한다.
손쉬운 통화정책보다는 고통이 따르는 구조개혁이 결국 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mirror@fnnews.com 김규성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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