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석학에 듣는다]

새로운 세대 격차

대서양 양안에 뭔가 흥미로운 투표행태가 부상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이전 세대와 현격히 다른 투표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분화는 소득이나 교육 수준, 성별보다는 세대를 기초로 하고 있다.

이 같은 분화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 젊은이와 노인의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삶도 달랐고, 전망도 마찬가지다.

미국과 유럽의 나이 많은 중년층은 좋은 삶을 누려왔다. 그들이 노동력에 편입됐을 때는 임금이 후한 일자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물었던 것은 독립을 가능케 해주는 일자릴 얻기까지 얼마나 부모와 함께 살아야 하느냐가 아니라 무얼 하고 싶으냐였다.

그 세대는 일자리 안정, 젊을 때 결혼, 집 장만-그리고 아마도 별장도- 그리고 최종적으로 적절한 노후가 보장되는 은퇴를 예상할 수 있었다. 부모들보다는 더 잘살 것으로 예상했다.

현재 노인 세대가 그 여정에 질곡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 길 대부분은 기대와 맞아떨어졌다. 그들은 집 덕에 근로소득보다 더 높은 자본 이득을 건졌을 것이다.

반면 젊은 세대의 기대는 그들이 소득구간 어디에 있건 정반대다. 이들은 평생 일자리 불안에 시달려야 한다. 평균적으로 대졸자 상당수는 구직에 수개월이 걸리고, 흔히 한두 개 무보수 인턴을 거친 뒤에야 취업이 가능하다. 이들은 자신들을 행운아라고 생각한다. 더 가난한 경쟁자들은 그 가운데 일부가 학업성적이 더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득 없이 1~2년을 버틸 수 없는 데다 무엇보다 인턴 자리를 얻기 위한 줄이 없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젊은 대졸자들은 빚에 허덕인다. 더 가난할수록 빚도 더 많다. 이들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묻지 않는다. 그저 어떤 일을 해야 학자금 융자를 갚을 수 있을지를 묻는다. 융자 상환은 대개 20여년이 걸린다. 마찬가지로 집 장만은 아득한 꿈이다.

이 같은 고난은 젊은이들이 은퇴 후를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오늘날 젊은이들은 세대 간 공정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중산층 가운데 상위 이상 계층 아이들은 결국 잘될 것이다. 부모들로부터 부를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부모에게 얽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그 대안은 더 싫어할 것이다. 대안은 '새 출발선'이다. 한때 중산층 삶의 기본으로 간주되던 것들을 향해 가기 위해서는 중간중간 놓인 카드를 스스로 쟁취해야만 한다.

이 같은 불공정성들은 쉽사리 설명되지 않는다. 이들 젊은이가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이 고난들은 오랜 시간 공부하고,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모든 것들을 '올바로' 한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사회의 불공평이라는 -경제적 게임이 이끄는 불공평- 개념은 금융위기를 부른 은행가들이 막대한 보너스를 챙긴 채 유유히 사라지고, 거의 아무도 잘못에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강화된다. 정치 엘리트들은 '개혁'이 전례 없는 번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렇게 됐지만 오직 상위 1%에게만 해당됐다. 다른 모든 이들은 젊은이들을 포함해 전례 없는 불안정성을 받았다.

이 세 가지 현실은-전례 없는 규모의 사회적 불공평, 엄청난 불평등, 엘리트들에 대한 신뢰 상실- 우리의 정치적 모멘텀을 규정한다.

변덕스러운 주식시장과 제로금리를 감안하면 계약금을 내줄 수 있는 부모가 없더라도 내집마련이 가능해지고, 은퇴 후의 안전도 보장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개혁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경제가 더 나아지지 않고는 청년들이 원만하게 일자리를 잡기 어려울 것이다. 미국의 '공식' 실업률 4.9%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위장된 실업을 감추고 있고 최소한 임금하락을 부르고 있다.

그러나 문제를 인식하기 전에는 고칠 수가 없다.
청년들은 문제를 안다. 그들은 세대를 아우르는 정의가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들이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다.

정리=dympna@fnnews.com 송경재 기자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