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 칼럼]

최저임금 더 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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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 일자리 예산만 16조원.. 중복사업 정리해서 아낀 돈 근로장려금으로 활용하자

펩시콜라와 코카콜라를 놓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맛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눈가리개를 한 참가자들은 헛다리를 짚기 십상이다. 4.13 총선을 앞둔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의 최저임금제 공약을 놓고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어떨까. 한쪽에선 "최저임금이 최저생계비는 돼야 한다. 영세업자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몫은 정부가 근로장려세제로 보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른 쪽에선 "최저임금을 2020년까지 1만원으로 올리고, 생활임금제 확산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한다. 누가 새누리이고 누가 더민주일까. 답은 보류하겠다. 중요한 것은 두 당의 의견이 대동소이하다는 점이다. 다른 공약은 몰라도 최저임금을 손질해야 한다는 데는 보수.진보 간 칸막이가 없다.

현실을 보자. 주위엔 최저임금(시간당 6030원)을 받는 비정규직들이 들으면 열 받을 소식만 가득하다. 작년에 5억원 이상 고액 연봉을 받은 사람들 명단이 줄줄이 발표됐다. 은행.대기업 중엔 평균 연봉이 1억원을 오르내리는 곳이 꽤 있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이 낸 '아시아의 불평등 분석'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소득 불균형은 이 지역 최고다. 부자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5%(2013년 기준)에 이른다. 외환위기 전인 1995년과 비교할 때 16%포인트 높아졌다.

한때 한국은 소득균형이 가장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거치며 신화가 깨졌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양극화가 가장 심한 나라로 분류된다. 우리 사회가 분노를 넘어 원한, 불신을 넘어 반감, 좌절을 넘어 포기, 격차를 넘어 단절, 갈등을 넘어 단죄로 치닫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대한민국은 어느덧 대한분국(分國)이 됐다.

더 늦기 전에 공동체 정신을 발휘할 때가 됐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장덕진 소장은 지난 2월 허핑턴포스트코리아와 인터뷰에서 "앞으로 숙제할 시간은 7~8년밖에 안 남았다. 사람들이… 패닉 상태가 되면 어떤 정책 수단도 소용이 없다"고 경고했다. 베스트셀러 '사피엔스'를 쓴 유발 하라리 히브리대 교수는 "평등을 보장하는 방법은 형편이 더 나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 이외에 없다"고 말한다. 약 230년 전 프랑스 혁명이 터진 이래 세계 정치사는 평등과 자유의 구조적인 모순을 화해시키려는 일련의 시도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이중화를 풀어갈 첫 단추로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을 제안한다. 최저임금제는 자본주의의 과속을 막을 최소한의 장치다. 다른 나라들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국은 다른 복지를 줄이는 대신 생활임금제를 도입했다. 최저임금 플러스 품위유지비가 생활임금의 개념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오는 2022년까지 최저임금을 시간당 15달러(약 1만7200원)로 올리기로 했다.

사실 우리 정부도 최저임금 인상을 마냥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노무현정부에선 연평균 10% 넘게 올랐다. 이명박정부 시절 5%대로 낮아진 인상률은 박근혜정부 들어 7%대로 높아졌다. 이 비율을 다시 10%대로 끌어올리면 좋겠다. 박 대통령이 공약한 대로 최저임금을 결정할 때 소득분배 조정분을 좀 더 반영하면 된다. 영세상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게 걱정이라면 새누리당 강봉균 공동선대위원장이 말한 근로장려세제를 활용하자. 일종의 정부 보조금이다. 재원은 중구난방 일자리 예산을 정리하면 된다. 올해 일자리 예산은 196개 사업에 걸쳐 15조8000억원을 집행한다. 일부 예산만 아껴도 큰돈을 마련할 수 있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는 "빈부격차가 지나치면 민주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의식을 약화시킨다"('정의란 무엇인가')고 우려한다. 빈부갈등은 공동체 정신을 좀먹는다. 19대 국회는 역대 최악 평가를 받는다. 벌써부터 20대 국회도 싹이 노랗다는 비아냥이 나오는 건 국가의 불행이다.
구관이 명관이란 소릴 들어선 안 된다. 20대 국회의 첫 작품으로 최저임금 인상 합의가 이뤄지길 바란다. 살 맛 나는 정치, 그거 그렇게 어렵지 않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