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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조세회피의 천국, 미국

서혜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4.08 17:30

수정 2016.04.08 17:30

[월드리포트] 조세회피의 천국, 미국

"미국으로 돈이 몰려가는 소리가 거인의 숨소리처럼 들린다."

최근 미국으로 대거 유입되는 조세회피성 자금을 지켜보며 스위스 로펌 아나포드의 변호사가 한 말이다.

사상 최대 규모의 조세회피처 자료인 '파나마 페이퍼스' 여파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파나마 최대 로펌인 '모색 폰세카' 고객 명부인 이 문건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등 현직 국가 지도자가 연루돼 충격을 주고 있으며 문건이 공개된 지 하루 만인 지난 5일 아이슬란드 총리는 사임했다.

흥미로운 점은 독일과 미국의 유력 정치인이나 부자들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문건을 처음 입수한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은 "실제로 이들이 명단에 없기 때문"이라며 "델라웨어, 와이오밍, 네바다 등에서 이미 역외회사를 만들 수 있어 굳이 파나마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고 설명했다.


사실 미국은 조세회피의 '천국'이다. 지난해 영국의 조세정의네트워크(TJN)가 선정한 가장 매력적인 조세회피처 명단에 미국은 스위스와 홍콩에 이어 세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파나마 페이퍼스'로 국가 이미지에 먹칠을 한 파나마는 13위로 미국보다 순위가 10단계나 낮았다. 컨설팅업체 매킨지앤코의 2012년 보고서에 따르면 네바다, 델라웨어, 몬태나, 사우스다코타, 와이오밍, 뉴욕 등이 인기 있는 조세회피처다.

미국이 매력적인 조세회피처로 꼽히는 이유 중 하나는 역외회사의 실소유주를 밝히도록 요구하는 내용을 담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공통보고기준(CRS)에 서명하지 않은 국가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역내-역외시장'이 꽃을 피웠다. 미국의 각 주가 전통적 역외시장과 비슷한 수준으로 계좌 비밀주의를 보장하고 세금혜택을 제공하면서 경쟁적으로 조세회피처 사업을 벌였다. 이들 주는 고객이 신분을 감추기 위해 유한책임회사(LLC)나 자산보호신탁 등 '셸 컴퍼니(shell company)'를 큰 비용 들이지 않고 아주 쉽게 설립할 수 있도록 했다.

전문가들은 일부 주에서 셸 컴퍼니를 설립하는 것이 도서관 대출카드 만드는 것보다 쉽다고 말한다. 운전면허증이나 여권 등 신분증을 보여주지 않아도 셸 컴퍼니를 설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서비스 제공업체들도 셸 컴퍼니의 실소유주 신분을 확인하거나 설립목적 등을 확인하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실소유주에게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제공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문제가 안 된다. 추가비용만 내면 기업 서비스 제공업체들이 '가짜 소유주' 명단을 제공해 실소유주가 신분을 위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세회피가 횡행하는 가운데 미국 재무부는 '파나마 페이퍼스'가 폭로된 다음 날인 4일 칼을 빼들었다. 다국적 기업들이 높은 법인세율을 회피하기 위해 세율이 낮은 외국에 본사를 옮기는 '수익 깎아내기' 방식을 겨냥한 새 규제안을 발표한 것이다. 6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미국 재무부는 셸 컴퍼니에서 25% 이상 지분을 지닌 개인들의 신원을 은행이 확인하도록 하는 안도 신설하기로 했다.

새 규제안 발표에 1600억달러라는 사상 최대의 화이자.앨러 간 인수합병이 무산됐고 미국에 자회사를 두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은 일자리 창출과 투자에 저해된다며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제이컵 루 미국 재무부 장관은 아무리 많은 재무부 법안도 조세회피를 멈추는 데 소용없을 것이라며 관련 법률 제정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법률 제정으로 가는 길은 온통 가시밭길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취임 초부터 부자들의 탈세를 적발하는 데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두겠다고 밝혔으나 그동안 슈퍼리치의 로비와 공화당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 재무부 역시 OECD의 국가 간 조세정보자동교환 표준모델(CRS) 기준에 맞춰 법안을 마련했지만 공화당의 반대로 의회 통과에 실패했다.
'파나마 페이퍼스'에 미국 정치인 이름이 왜 없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sjmary@fnnews.com 서혜진 로스앤젤레스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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