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사설

[염주영 칼럼] 국민 우습게 아는 정치 끝내자

염주영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4.11 16:55

수정 2016.04.11 16:55

어김없이 토끼몰이 전술 등장
유권자는 집토끼가 아니라 야생마 길들이는 주인돼야
[염주영 칼럼] 국민 우습게 아는 정치 끝내자

선거판에서 나는 유권자로서 존중받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각 당과 후보들이 어르고, 달래고, 읍소하고, 때론 윽박질러대는 통에 도무지 존중받는다는 생각을 가져보지 못했다. 토끼몰이에 걸려 쫓기는 토끼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는 느낌뿐이다. 그래서 나는 선거전을 토끼몰이에 비유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낀다. 선거전략가들이 집토끼가 어떻고, 산토끼가 어떻다고 얘기하는 걸 들을 때면 더욱 그렇다.

선거판의 토끼몰이에는 몇 가지 전술이 있다.
첫 번째 전술은 지역감정 자극하기다. 이성보다는 감정선을 건드려 폭발시킨다. 일종의 흥분제 같은 것을 주사해 수많은 토끼를 순식간에 한 방향으로 몰아간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지난 6일 전북 전주 유세에서 이 전술을 구사했다. 그는 "전북은 지난해 예산 증가율이 전국에서 꼴찌"라면서 "여러분은 배알도 없습니까. 전북도민은 정신 차리십시오"라고 했다. 호남의 지역적 박탈감을 부추기면서 비속한 말과 훈계조의 연설로 지역감정을 자극했다.

다음은 황당공약 살포하기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는 "삼성전자의 미래차 산업을 광주에 유치해 5년간 일자리 2만개를 창출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민간기업의 투자 결정에 정치권이 끼어드는 것은 금물이다. 이것은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기본 룰이다. 김 대표가 이 점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그는 재벌보다는 중소기업 중심의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온 사람이다. 호남지역 판세가 위급하다고 판단되자 무리수임을 알면서도 대기업 일자리를 미끼로 삼아 토끼를 유인했다.

김 대표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여야 후보들이 한두 번씩은 이 전술을 구사했다. 사탕발림은 토끼를 유인하는 데 꽤나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읍소하기 전술도 자주 등장했다. 유권자를 만나면 다짜고짜 무릎 꿇고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정작 본인도 잘 모른다. 토끼를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기만 하면 된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우습게 여기는 것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합당한 절차와 유권자의 의사를 무시한 채 이뤄진 새누리당의 공천 과정이 그랬다. 셀프공천으로 비판받은 더불어민주당의 비례대표 공천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인들의 태도와 생각이 잘 바뀌지 않는다면 국민이 달라져야 한다. 다행히도 이번 선거전에서는 그런 변화의 조짐이 감지된다. 여야 모두 텃밭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대구에서 새누리당 후보들이, 광주에서는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이 고전한다는 소식이다. 집토끼들이 비로소 정치적 자의식을 되찾기 시작한 것 같아 반갑다. 나는 유권자로서 집토끼란 말을 들을 때가 가장 못마땅했다. 집토끼라니, 도망가라고 문을 열어줘도 겁이 나서 도망가지 못한다는 뜻인가. 텃밭 유권자는 더 이상 봉이 돼선 안 된다.

국민이 안중에 없는 정치가 되풀이되고 있다. 우리 정치의 고질병이다. 정치인들이 잘 못한 측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국민이 제 구실을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의 실패는 결국 유권자의 실패다. 유권자가 제대로 사람을 가려 뽑지 못해서 빚어진 현상이다. 그래서 유권자의 어깨가 무겁다. 유권자들은 이번 총선에서 거칠고 무례하고 주인을 섬길 줄도 모르는 야생마를 상대로 단 한 번의 명령으로 앞으로 4년 동안 주인 노릇을 해야 한다.

'라파 다스 베스타스(Rapa das bestas)'는 스페인어로 '야수(야생마) 털 깎기'란 뜻이다.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에서 400년 동안 이어져온 전통 말축제의 이름이다. 이곳 주민들은 예부터 야생말을 잡아 방목하기 전에 털을 깎고 낙인을 찍었다. 야생마 길들이기 작업이다. 그 일이 축제로 발전했다.
우리는 이번에 쓸 만한 야생마를 잘 골라 털을 깎고 낙인을 찍어야 한다. 야생마 길들이기를 제대로 못해서 또 4년을 후회하며 보내는 일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
유권자가 야생마 길들이기에 나서야 할 시간이다.

y1983010@fnnews.com 염주영 논설위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