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인찬 칼럼]

파산이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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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망할까봐 안절부절.. 정부는 '헬리콥터 맘' 노릇
'창조적 파괴' 스스로 차단

영화 '곡성'은 깜깜한 도화지 같다. 경찰 '종구'(곽도원)한테 왜 이런 비극이 생기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나홍진 감독이 한 가지 힌트를 준다. "사람이 무기력하게 비극을 맞아야 한다면 도대체 사람은 왜 사는 걸까 궁금했다." 나는 이 말에서 부조리를 떠올렸다.

부실기업 구조조정은 부조리의 결정판이다. 부조리의 반대말은 상식이 아닐까. 조선.해운업계에 쌓인 부실, 그 부실을 떨어내는 과정을 보면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가망 없는 회사에 수천억, 수조원을 쏟아붓는 강심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까무라칠 만큼 큰 돈이 허공으로 날아갈 판이지만 책임진다는 사람은 없다. 현실의 부조리는 영화를 능가한다.

왜 이렇게 된 걸까. 근본적으로 우리가 파산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기업은 다윈식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르는 게 마땅하다. 조지프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는 자본주의의 속성"이라고 갈파했다. 파산은 창조적 파괴의 한 단면이다. 실력 없는 기업은 퇴출이 순리다. 그래야 생태계가 건강하다.

우린 거꾸로 간다. 부실기업, 특히 대기업이 망할까봐 벌벌 떤다. 정부는 '헬리콥터 맘' 노릇 하느라 바쁘다. 파산을 막는 장치가 삼중, 사중으로 둘러쳐 있다. 단계별로 짚어보자. 지난 2013년 동양사태가 터지자 금융당국은 관리채무계열제도를 도입했다. 회사채.기업어음(CP) 등 비은행권 빚이 많은 기업들을 미리 체크하기 위해서다. 이게 1단계다. 이어 은행 빚이 많은 그룹은 주채무계열로 지정된다. 재무상태가 도드라지게 나쁘면 채권단과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는다. 이게 2단계다.

3단계는 자율협약이다. 이때부터 채권단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자구안 제출은 필수다. 대신 채권단은 추가 자금을 지원하거나 대출을 출자로 전환하는 시혜를 베푼다. 4단계는 워크아웃, 곧 기업구조개선작업이다. 자율협약이 체질개선이라면 워크아웃은 대형수술이다. 경영권 내놓고 팔 수 있는 건 다 팔아야 한다. 최종 5단계는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 곧 통합도산법에 근거를 둔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다. 기업의 운명은 청산과 존속 두 갈래로 갈린다. 법원이 청산 명령을 내리면 기업은 소멸한다.

이 중 1~3단계는 임의의 장치다. 법적 근거가 없다 보니 아무나 기웃댄다. 정치인들은 상습 훼방꾼이다. 좀비기업들이 가로채는 구제금융은 정치인들에겐 훈장이다. 특히 자율협약이 문제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자율협약이 워크아웃에 비해 결코 선제적 구조조정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되레 "자율협약이 대기업의 구조조정을 지연시키고 불투명한 관치금융을 유발하는 주요인"이라는 것이다. 최근 김 교수가 경제개혁연구소를 통해 발표한 보고서('과연 자율협약은 선제적 구조조정 수단인가?')는 곱씹어 볼 가치가 있다.

4단계인 워크아웃이 꼭 필요한 장치인지도 의문이다. 워크아웃을 규정한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은 한시법이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2001년 처음 도입됐고, 이후 2~3년 단위로 시한을 연장하고 있다. 현 기촉법은 2018년 6월 만료된다. 왜 한시법인가. 워크아웃은 외환위기의 충격을 덜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꺼낸 카드라는 점을 기억하자. 임무를 다했으면 간판을 내리는 게 맞다.

복잡한 선제적 구조조정은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를 낳는다. 그 속에서 한계기업과 채권단, 금융당국, 정치권이 한통속으로 돌아간다. 차라리 1~4단계를 싸그리 없애면 어떨까. 경영에 실패한 기업을 곧장 법정관리로 보낸다고 생각해 보라. 기업이든 은행이든 바싹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국책 산업.수출입은행이 부실기업의 돈주머니 노릇 하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정치가 간섭할 여지도 작다. 당국은 부실이 시스템 리스크로 번지는 일만 막으면 된다.


복잡한 데서 부조리가 자란다. 부조리의 적은 단순함이다. 망할 회사는 그냥 망하도록 내버려두자. 자본주의를 한다면서 파산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썩은 살을 도려내야 새 살이 돋을 게 아닌가.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