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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초식'과 '채식주의자'의 거리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6.01 17:00

수정 2016.06.01 17:00

[fn논단] '초식'과 '채식주의자'의 거리

최근 한강의 작품집 '채식주의자'가 국제적인 문학상인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했다. 언론에서는 이 상이 노벨상, 공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의 하나라고 극찬한 바 있다. 문학상을 이렇게 세 개로 압축해서 설명하면 그 상의 수상이 미치는 효과는 물론 엄청나게 클 것이다. 그렇지만 세계적인 문학상이 비단 이 세 개밖에 없을 리는 만무한 노릇이고 또 그 많은 문학상들을 이렇게 서열화하는 것도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한강의 이번 맨부커상 수상의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이 상을 받은 작가가 노벨상을 받기도 하고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가 이 상의 후보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이 상은 확실히 영어권 세계에서는 매우 권위 있는 상인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만큼 우리 문학의 국제적 위상이 한 단계 제고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라 할 것이다. 물론 이 쾌거가 작가 한강의 뛰어난 문학적 성취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하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바친 그동안의 각계의 노력들이 맺은 결실의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등 세 작품으로 구성된 연작품이다. 세 작품이 제각각 문학적 완결성을 갖추고 있어서 독립적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이 중 '몽고반점'은 2005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고 개인적으로도 위의 세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예술성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몽고반점은 태어날 때부터 어린 아이의 옆구리나 어깨, 엉덩이에 나타나 있는 푸른 반점으로 이 작품에서는 그것의 의미가 태초의 생명과 진화되기 전의 순수성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작품은 다양한 각도에서 읽을 수 있으나 핵심은 '채식과 육식의 대립구조'이다.

'채식주의자'는 주인공 영혜가 희한한 꿈을 꾸고 난 뒤 채식주의자가 된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이 꿈을 꾸고 난 뒤부터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고 남편과의 잠자리도 거부한 채 식물성의 길을 걸어간다.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월남전에 참전한 바 있는 아버지는 영혜에게 강제로 고기를 먹여보지만 영혜는 오히려 과도로 자신의 손목을 긋는 것으로 대항한다. 월남전이라는 표현 속에서 전쟁과 살육을, 아버지의 강제 속에서 폭력을 읽을 수 있는 바 이 작품은 전쟁과 살육과 폭력이라는 동물성에 저항하는 식물성의 대안적 상상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물성과 식물성의 대립구조를 환상적으로 처리한 작품이 비단 작가 한강에게서 유일한 것은 아니다.
이미 1960년대 대표작가라 할 이제하의 그 유명한 '초식'에서도 이것이 매우 환상적으로 그려진 바 있다. 이 작품에서도 육식이 무자비한 탐욕과 약육강식의 폭력을 상징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선거 때마다 초식을 하는 행위에는 육식의 정치를 거부하고 초식의 평화로운 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민중들은 그런 아버지보다 '도수장 주인의 소(민초?) 잡는 솜씨'에 더 열광함으로써 아버지의 기대는 좌절된다. 그 좌절은 작가 이제하뿐만 아니라 당대 지각 있는 모든 사람들의 좌절이었겠지만 오늘 '채식주의자'의 비극적 결말의 의미는 어떠할까. '초식'의 시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시대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김진기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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