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저성장 극복 '소프트 파워'에 길이 있다] 가난한 황혼.. 단순 노무직이라도 뛰어들 수밖에

조상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6.22 17:47

수정 2016.06.22 17:47

파이낸셜뉴스 창간 16주년 기획
중견기업 임원까지 지냈지만 은퇴하니 노후자금 턱없이 부족
집 줄이고 저축한 돈 까먹고 있죠
자식들도 어려워 손벌릴 수 없어 단순 노무직이라도 뛰어들 수밖에
이러다 병이라도 걸리면..막막..
청년부터 노인까지 위기 속에 사는 한국인
복지·성장 양날개로 '양극화의 굴레' 뛰어넘어라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모두 힘들다. 청년은 청년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아이들은 학원, 과외와 성적경쟁에 짓눌리고 부모들은 사교육비에 허리가 휜다. 젊은이들은 취직을 못해 힘들고 직장인들은 명예퇴직에 정리해고로 하루하루가 불안한데 그나마 정규직은 안정된 직장이어서, 비정규직은 직장이라도 있어 다행이라는 말로 위안을 찾는다. 창업을 해보겠다고 나섰다가 몇 년 버티지 못해 노후자금을 모두 탕진하고 나앉는 자영업자들에게는 그마저 기댈 언덕이 없기 때문이다.

경기는 나빠지는데 물가는 뛰기만 하고, 월급이나 수입은 그대로인데 오르는 전셋값과 임대료에 서민들은 계속 바깥쪽으로 밀려나고 있다. 저성장이 낳은 대한민국의 위기. 창간 16주년을 맞은 파이낸셜뉴스는 우리 사회 위기의 근원과 실체,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청년부터 노인까지…위기 속에 사는 한국인'을 통해 각 세대가 처한 현실을 짚어보고 나아가 대안을 마련해 보고자 한다.


[저성장 극복 '소프트 파워'에 길이 있다] 가난한 황혼.. 단순 노무직이라도 뛰어들 수밖에

"대기업을 다니다 일찍 회사에서 나와 창업했다가 망한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래도 중견기업에서 임원까지 지내고 은퇴한 나를 부러워하던 시절이 있었지. 그런데 나이 먹고 나니까 다 비슷하더라고. 몇 년 뒤 통장에 돈이 하나도 없을 때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와."

6월의 어느 주말 경기 고양시 일산의 한 공원에서 만난 김모씨(73)의 얘기다. 김씨는 50대 중반 국내 한 중견기업에서 전무이사를 마지막으로 퇴직, 5년간 개인사업을 한 뒤 60대에 들어서부터는 또래 대부분이 그렇듯 별다른 직업 없이 '백수' 생활을 하고 있다.

최근 종합건강검진 결과 나이에 비해 건강하다고 나왔지만 김씨는 이내 우울한 감정에 휩싸였다고 했다. 의료기술 발달로 기대수명은 늘어나고 있지만 자산이 급격히 줄어드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김씨는 30대와 40대 직장인 아들에게 정기적으로 용돈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지만 자식들이 내집 마련과 전세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터라 되레 도와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은퇴 후 집 크기를 줄여 2차례 이사해 현재의 66㎡(20평)대 초반 아파트에 정착한 김씨로서는 더 이상 집을 처분해 차익을 남기기도 쉽지 않다.

김씨는 "아들 둘 대학 보내고 결혼시키느라 노후대비 시기를 놓쳤다. 100만원 남짓한 국민연금에 의지하고 있지만 각종 보험료와 생계비 등을 내고나면 모자라 모아둔 예금을 수시로 인출해 지금은 5000만원 정도만 남았다"면서 "사실상 숨만 쉬며 동네 주변을 산책하는 게 주된 일상"이라고 전했다.

■부모부양 의식 저하.생계난…노후생활 이중고

공원에서 김씨처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하는 노인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5년 전 직장 은퇴 후 건물 경비일을 하던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근근이 식당 등에서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꾸려가던 최모씨(65)는 4년 전 남편이 생전에 대신 납부해줬던 국민연금을 탈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일을 접었다. 당초 최씨는 지병인 관절염이 악화돼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남편이 사망하면서 대출금이 남은 아파트를 처분한 뒤 별다른 재산이 없었던 탓에 생계전선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국민연금이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1인 최저생계비(2016년 약 64만원)에도 못 미치는 월 33만원의 연금 수령액으로는 절약을 한다고 해도 빠듯하기만 했다. 결국 최씨는 얼마 전부터 서울에 거주하는 외동딸을 설득해 손녀 돌보는 일로 용돈벌이를 시작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딸이 직장에 출근하기 전까지 딸집에 도착해 네살짜리 손녀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후 일찍 데려온 뒤 집안일 등을 해주는 게 하루 일과다. 그는 "딸이 직장어린이집을 이용하고 있었지만 나이와 몸 상태를 따져보면 딱히 일할 곳도 없는 실정이어서 딸에게 당분간 아이를 봐주겠다고 했다"며 "딸도 월세를 사는 형편이라 많이 주지는 못한다며 수십만원 정도를 손에 쥐여주는데 언젠가 이 일마저 못하게 되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다"고 털어놨다.

공원에서 만난 노인 대부분은 삶의 무게가 과거에 비해 상당히 버거워졌다고 전했다. 과거에는 그다지 벌어놓은 게 없어도 자식농사만 제대로 지으면 노후가 편안했지만 부모 부양 생각을 하는 자녀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얘기였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부모 부양의 책임자'가 가족이라는 인식은 1998년 조사대상의 89.9%로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2014년에는 31.7%로 크게 줄었다.

예전에 비해 평균수명은 늘어났지만 크게 오르지 않는 부동산 가격과 은행의 저금리로 시세차익과 이자수익이 급격히 줄어든 것도 노인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1970~1990년대 7~9%의 고성장 시기에는 별다른 준비 없이 자산의 대부분인 부동산과 예금 자산만을 갖고도 은퇴 후 비교적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3%대로 평균성장률이 떨어진 2010년대 들어 노후대책을 제대로 세울 시간도 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린 노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노인빈곤율 OECD 1위…노후파산 심각

2015년 기준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중위소득 50% 미만 비율)은 49.6%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다. OECD 평균(12.6%)에 비해서도 4배나 높은 수치로, 65세 이상 노인 절반이 빈곤 상태에 처한 셈이다. 한국은 오는 2026년 초고령사회(인구 5명당 1명이 고령자)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돼 노인 빈곤율은 더욱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 고령자 자살률 역시 노인 10만명당 55.5명으로 OECD 평균(21.7명)의 2배를 넘는다.

'노후 파산' 문제도 저성장 시대를 맞아 새롭게 등장한 현상이다. 실제 서울중앙지법에서 올 1∼2월 파산 선고를 내린 1727명 가운데 60대 이상은 전체의 24.8%(428명)에 달했다. 최대 경제활동 계층인 50대(37.2%)보다는 적지만 40대(28.2%)와 비슷하고 30대(8.9%)를 웃도는 수치다. 빚을 져도 근로능력이 있어 갚을 수 있는 젊은층과 달리 노인층은 소득이 있어도 생계비 등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채무변제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노인의 28.9%는 생계유지를 위해 경제활동에 뛰어들고 있지만 3명 중 1명이 단순노무직에 종사하는 등 일자리 질은 낮은 편이다. 한국노동연구원에 따르면 전체 임시직은 지난해 12월 이후 증가세가 둔화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60세 이상에선 매달 10만명 안팎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8월 9만5000명이던 60세 이상 임시직은 12월에는 13만8000명까지 매달 늘더니 올 들어서도 1월 11만3000명, 2월 9만1000명, 3월 11만7000명으로 증가세다. 정성미 노동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주로 은퇴연령층인 60세 이상이 은퇴 후 소득 보전을 위해 노동시장으로 나왔지만 상용직을 구하기 어려워 임시직으로 가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상황에서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빚의 굴레에 빠질 수밖에 없다. 노인 대부분이 노후생활을 위해 국민연금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보사연은 최근 소득대체율(연금 받을 때 금액이 가입기간 평균소득과 대비해 어느 정도의 비율인지를 나타낸 지표)이 현저히 낮아지면서 현재의 국민연금 급여 수준과 수급자격 여건을 그대로 두고서는 40~50년 후에도 빈곤 완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전망을 내놨다.
40년 가입 기준으로 1988년 국민연금 도입 당시 70%였던 소득대체율이 2차례에 걸친 제도개편으로 지난해 46.5%를 기록한 데 이어 2028년까지 단계적으로 40%까지 떨어지게 설계돼 노인 상당수가 턱없이 적은 연금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 이준협 연구위원은 "선진국은 생산가능인구 연령대(15∼64세) 이후에는 연금소득으로 살 수 있지만 우리나라는 연금제도가 제대로 받쳐주지 못해 은퇴 후에도 일해야 한다"며 "대부분 경비 등 이전에 해본 적 없는 일이나 근로여건이 좋지 않고 박봉을 받는 임시직을 하게 된다.
임금체계를 개선해 기존에 하던 일을 계속 할 수 있도록 하고 고령층이 할 수 있는 직업.직종을 개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mountjo@fnnews.com 조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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