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 칼럼] '실연의 박물관'을 아십니까?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7.03 17:23

수정 2016.07.14 19:15

[데스크 칼럼] '실연의 박물관'을 아십니까?

제주 여객터미널 인근 건입동이라는 곳에 가면 독특한 콘셉트의 문화공간이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러브호텔 영업을 했지만 지금은 미술관이 된 '아라리오뮤지엄 동문모텔2'입니다.

낡은 모텔이 미술관으로 변모한 사연도 재미있지만 지금 이곳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이별 혹은 헤어짐에 관한 일반인의 기억과 그 증거품들을 기증받아 전시하는 '실연의 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입니다. 실연이라고 하면 언뜻 남녀간의 사랑(에로스·Eros)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전시의 영문 타이틀을 보면 그것은 더 넓은 의미의 사랑(아가페·Agape), 혹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연의 박물관'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0년 전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서였습니다.
한때 연인 사이였던 조각가 드라젠 그루비시치와 영화 프로듀서 올링카 비스티카는 헤어지면서 함께 소유했던 처치 곤란한 물건들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 궁리하다가 이 전시를 고안하게 됐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조금은 엉뚱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실연의 박물관은 지금까지 전 세계 22개국 35개 도시에서 열려 100만명에 가까운 관람객을 미술관으로 불러들였고, 또 그들을 울렸습니다.

과문(寡聞)한 탓인지 모르지만 미술관에서 눈물을 흘려본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비극적 탄식을 불러일으킨다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앞에서도, 민간인 대학살의 참상을 그렸다는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보면서도 솔직히 무덤덤했습니다. 한데 이번에 난생 처음으로 미술관에서 울컥 목이 메는 경험을 했습니다. 7년 전 사별한 남편(혹은 아빠)에게 보내는 세 통의 편지와 함께 기증됐다는 낡은 코란도 자동차 앞에서입니다.

"당신의 손길이 없으니 시동도 걸리지 않고, 문도 잘 열리지 않지만, 눈과 비를 맞으면서 가족을 지키던 당신 같은 차! (중략) 당신 이대로 밖에 더 오래 서 있으면 더 상하겠어요. 자기 여기서 힘들게 서 있지 마요. 당신이 여기서 지켜보고 있었던 시간보다 더 길게 이제 우리가 당신을 찾아갈게요."(아내의 편지)

"아빠! 나 아빠를 다시 만난다면 그동안 너무 보고 싶어서 그냥 아빠 안고 울고만 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우리 아빠 차를 기꺼이 전시해주신 박물관에 감사합니다."(아들의 편지)

이번 전시는 이렇게 누군가와 죽음으로 이별한 경우를 비롯해 예고도 없이 끝난 연애에 대한 기억, 잃어버린 공간에 대한 추억, 못마땅했던 자신의 옛 모습과의 결별 등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이별 혹은 헤어짐에 관한 사연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자칫 감상적으로 흐를 수도 있는 전시가 돋보일 수 있게 된 건 사적일 수밖에 없는 상처와 아픔을 고백이라는 형식을 통해 공개하고, 이를 통한 치유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탐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기증자와 관람자의 공감으로 이어지는데, 이 공감의 과정이 이번 전시의 핵심이자 성공 요인으로 보입니다.

전시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은 박물관을 빠져나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나 같으면 ○○○을 기증할 텐데…"라고 말입니다. 이별이란 매우 사적인 것이지만 또한 보편적인 경험이어서 누구에게나 가슴 아픈 사연이 하나씩은 있게 마련입니다.
이제 곧 휴가철입니다. 올여름엔 '실연의 섬' 제주에서 나의 아픈 과거를 하나쯤 떠나보내는 건 어떨까요.

jsm64@fnnews.com 정순민 문화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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