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주영 칼럼]

홍기택의 실패한 현실 참여

지령 5000호 이벤트

명분·가치 뚜렷하지 못하면 맹목적 권력 추구에 빠져
나라도 개인도 망치기 십상

학자 출신으로 KDB산업은행 회장을 지낸 홍기택의 좌충우돌이 아슬아슬하다. 지난달 초순 중국 베이징에서 혈혈단신으로 실세들과 맞짱을 떴다. 국내 한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지난해 10월 열렸던 청와대 서별관회의 내용을 폭로했다. 대우조선해양에 4조2000억원의 구제금융을 지원하기로 결정할 때 자신은 들러리였다고 주장했다. 당시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 임종룡 금융위원장을 거명하며 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이것이 자신을 더 큰 위험 속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당대의 실세 3명을 상대로 맞짱을 떴다.

그의 들러리 주장은 그 자리에 참석한 면면으로 볼 때 사실일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그는 산업은행 금고의 열쇠를 지닌 사람으로서 그 금고를 열어 돈을 꺼내준 장본인이다. 범죄에 비유하면 모의 단계에서는 들러리였을지 모르나 실행 단계에서는 주범 아니면 공동정범에 해당한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열흘 동안 베이징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들은 더욱 종잡을 수 없다. 그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를 맡고 있지만 지난달 25일 열린 첫 연차총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이틀 뒤 6개월짜리 장기 휴직계를 냈다. 그런데 AIIB는 그의 거취와 관련해 사퇴 처리와 후임인선 수순을 밟고 있다. 휴직계를 냈는데 사퇴 처리하는 배경이 궁금하다. 본국과 사전 협의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이는 이유는 무얼까.

AIIB는 아시아 지역의 인프라(사회간접자본)를 건설하기 위해 중국이 주도해 만든 신설 국제금융기관이다. 잘만 되면 중동특수에 버금가는 아시아특수를 몰고 올 수도 있다. 그래서 지난해 미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AIIB 가입을 결행했다. 그리고 국가의 외교력을 총동원해 AIIB 내 요직인 부총재 자리를 가까스로 차지했다. 부총재 자리를 확보하고 있어야 우리 기업의 아시아 인프라특수에 참여할 기회를 넓힐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 부총재 자리를 홍기택이 정부와 상의도 없이 내던져 버렸다. 어이없는 국익훼손 행위다.

그의 돌출 언행은 그 전부터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자칭 낙하산이었다. 박근혜정부 출범 초기인 2013년 중앙대 교수였던 그가 KDB산업은행 회장이 되자 낙하산 논란이 일었다. 금융 현업이나 정책업무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런 경우 낙하산이 아니라고 발뺌하는 게 상례인데 그는 예상을 깨고 과감하게 커밍아웃을 했다. 그해 국감에서 "낙하산이라 부채가 없다"고 밝혔다. 대통령 이외에는 신세 진 사람이 없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과 인연이 깊다. 서강대 동문으로 캠프 시절 예비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 대선 후에는 인수위 경제1분과위원으로 활동한 측근 실세다.

권력에서 멀어지면 춥다. 그렇다고 너무 가까이 다가가다가는 불 속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권력에 타 죽을 수도 있다. 관료들은 평생 그런 환경 속에서 단련돼 있어 위험을 관리할 줄 안다. 그러나 학자는 그런 경험이 일천해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지난달 발표된 감사원 감사 내용은 예전과 달리 매서워졌다. 검찰 수사도 턱밑까지 추격해 왔다. 막대한 세금손실을 초래한 대우조선해양을 부실하게 관리했다는 책임으로부터 그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홍기택의 몰락은 학자가 현실정치에 참여할 때 어떤 각오와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무엇보다 추구하는 명분과 가치가 뚜렷해야 한다. 어디까지 현실과 타협하고 어느 선부터 원칙을 고수할 것인지 경계선이 명확히 설정돼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이 추구했던 명분과 가치가 훼손될 때 단호히 접고 학자로 돌아갈 수 있다.
그 시기를 놓치면 남는 것은 권력에 대한 맹종뿐이다. 그렇게 권력에 취해 지내다 보면 나라도 망치고, 자신의 인생도 망치는 결과를 피하기 어렵다. 홍기택의 사례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다.

y1983010@fnnews.com 염주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