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 칼럼] '패셔니스타' 英 총리의 지명연설

김규성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7.14 17:24

수정 2016.07.14 17:24

[데스크 칼럼] '패셔니스타' 英 총리의 지명연설

13일(이하 현지시간) 취임한 영국 총리 테리사 메이가 지난 11일 총리로 확정됐을 당시, 인사말을 곁들여 내놓은 짧은 지명연설은 의외였다.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라는 대형사고를 쳐놓고 차기 영국 총리로서 브렉시트에 관련된 언급, 나아가 단어조차도 거의 꺼내지 않았다. 투표결정도, 탈퇴결정도 자신들이 했고 글로벌 정치.사회 전반에 충격파를 몰고온 원죄가 있는데…. 사라진 대영제국의 영광에 파묻혀 사는 영국인들의 말도 안되는 자존심에 말도 못 꺼내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짧은 연설을 곱씹어 봤다. 많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브렉시트란 단어는 거의 없었지만 원인을 치유하기 위한 많은 처방들이 있었다.
메이 총리는 "특혜 받는 소수가 아닌 모두를 위한 나라가 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론 "더 여유있는 노년 세대와 경제적으로 어려운 젊은 세대 간에 간격이 벌어지고 있고, 부유한 런던과 영국의 다른 지방 간에도 깊은 틈이 있다"고도 했다. 소득, 세대, 지역 간 틈이 브렉시트 결정을 불러왔고, 최우선적으로 이런 간극을 메우겠다는 것이다. 대기업 개혁 필요성도 짧은 연설 속에 분명한 어투로 포함시켰다.

사실 경제 문제만 봤을 때 영국의 경기흐름은 호조세다. 브렉시트 반대를 주창했던 데이비드 캐머런 전 총리 정부가 투표에서 질 이유가 없다. 영국 경제는 주요 7개국(G7) 가운데 가장 높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고, 6월 실업률은 5%로 2005년 이후 최저치다. 시장에선 미국에 이어 가장 먼저 기준금리 인상에 나설 주요국으로 영국을 꼽았을 정도다. 그렇지만 표심은 달랐다. 전문직, 관리직, 런던 거주자 등은 EU 잔류를 지지했다. 비숙련 노동자와 쇠락한 영국의 공업지역들은 탈퇴를 원했다. 대학 졸업 이상자들은 잔류를, 고졸 이하에서는 탈퇴를 지지했다.

양극화가 불러온 결과다. 올 11월 대통령선거를 앞둔 미국 또한 영국과 비슷한 상황이다. 지난해 과감하게 금리를 올리면서 경기회복을 선언했던 미국은 최근 이도저도 못하고 있다. 단기적으론 브렉시트 등으로 인한 불확실성, 5월 한때 급감했던 신규 일자리 숫자 등 불안한 고용이 부담이다. 하지만 큰 흐름으로 봤을 땐 자신감을 잃어가는 경제와 이로 인한 정치.사회 불안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게 맞다. 인종, 계층 간 소득격차와 이로 인한 갈등은 최근 흑인과 경찰 간 총격전을 불러올 정도까지 와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보고서에서 2014년 현재 아시안과 백인 가계의 소득 중간값은 경기침체 이전인 2007년 소득수준의 94% 이상으로 회복됐지만 흑인 가계의 소득수준은 88% 회복하는 데 그쳤다고 밝혔다.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급부상도 이 같은 정치, 경제, 사회적 갈등의 결과물이다.

영국, 나아가 미국의 변화가 한국에 주는 의미는 크다. 1970년대 이후 서구를 지배해온 신자유주의의 확연한 퇴조이기 때문이다. 세계화를 내세운 신자유주의로는 다 같이 잘살 수 없고, '빈익빈 부익부' 심화와 사회갈등 증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 양극화 해소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어서다. 한국의 양극화도 미국, 영국에 못지않다.
'흙수저' '금수저' 등 수저 논란이 대표적이다. 대처 이후 26년 만에 등장한 영국 여성 총리의 화려한 패션에 홀려서는 안된다.
내년 대선을 앞둔 정치권은 미국민과 영국인의 표심 변화가 한국에 이미 상륙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mirror@fnnews.com 김규성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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