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곽인찬 칼럼] 광해군이 사드를 봤다면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7.25 16:52

수정 2016.07.25 16:52

명·청 사이서 실리외교 추구.. 약소국은 더 센 나라 잡아야
'안보는 미국'이 올바른 선택
[곽인찬 칼럼] 광해군이 사드를 봤다면

나 광해군. 맞아, 조선 15대 왕. 요즘 대한민국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 옛 생각이 나서 한마디 할까 해. 그때랑 지금이랑 비슷한 점이 많아. 아, 물론 다른 점도 있지. 결론은 이따 이야기할 테니 우선 내 얘기부터 들어보시길.

400여년 전 임진왜란 때 나는 왕세자였어. 그때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 왜적을 물리쳤지. 신하들은 이걸 재조지은(再朝之恩)이라 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어. 거의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은혜란 뜻이야. 글쎄, 현실주의자인 나는 좀 다르게 봐. 고맙긴 하지만 제 땅을 피로 물들이기 싫어 조선 땅을 전쟁터로 삼았다는 게 내 생각이거든.

내가 임금일 때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해 후금을 세웠어. 후금은 나중에 청나라가 돼. 다급해진 명나라에서 파병 요청이 왔지. 난 우리 군사를 보낼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었어. 동아시아 패권은 청나라로 넘어갈 게 불을 보듯 뻔했거든. 괜히 명나라 편에 섰다 나중에 무슨 꼴을 당하려고. 그랬더니 사색당파가 초당파적으로 뭉쳐서 임금을 공격하더라고. 요즘으로 치면 새누리당 친박.비박이 더민주.국민의당과 힘을 합쳐 대통령을 압박하는 모양새라고나 할까.

어쩔 수 없이 강홍립을 도원수 삼아 군사 1만명을 압록강 넘어 요동 땅으로 보냈지. 명군은 완전 당나라 군대였어. 이런 군대가 어떻게 청나라를 이길 수 있겠어. 조선군도 철기군한테 패했지. 강홍립 장군은 항복했고. 그랬더니 또 조정에서 이걸 갖고 물고 늘어지는 거야. 내가 강 장군한테 싸우는 척하다 투항하라고 몰래 지시를 내렸다나 어쨌다나. '광해군일기'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 지금 부인해 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그 때문에 나는 임금 자리에서도 쫓겨났어.

내 자리를 꿰찬 인조는 일편단심 친명 정책을 폈어. 내가 명나라에 배은망덕하게 굴었다는 게 쿠데타 명분이니 어쩌겠어. 청나라가 가만 있겠어? 병자호란 때 왕은 무릎 꿇고 빌고 세자는 인질로 끌려가고 난리도 아니었어. 인조는 어쩌자고 다 망해가는 명나라 편을 들었을꼬. 순진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자, 이제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이야기를 해 볼까. 400여년 전과 비슷한 건 두 강대국이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거야. 이럴 때 작은 나라들은 줄을 잘 서야 해. 기준은 오로지 국익이야. 인조처럼 공허한 의리나 명분에 휩싸이면 안 돼. 미국은 옛날로 치면 명나라 같은 은인국가야. 물론 고맙지. 하지만 무조건 미국 편을 들어야 할 의무는 없어. 국제정치에선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으니까. 의리니 명분이니 하는 건 개나 줘 버려.

그럼 중국한테 붙자고? 노 노. 지금의 미국은 옛날 명나라가 아냐. 부패한 명나라 사신들은 마치 굶주린 이리떼 같았어. 올 때마다 금은보화를 박박 긁어가는 통에 조선의 재정이 휘청거렸지. 반면 미국은 건강한 나라야. 최강국 지위도 견고해. 트럼프가 나와서 좀 혼란스럽긴 하지만 오대양에 항공모함을 띄울 수 있는 나라는 아직 미국밖에 없어. 중국이 많이 쫓아왔지만 아직 미국과 맞짱 뜰 정도는 아니야.

중국과 사이가 틀어지면 경제가 타격을 입을 거라고 걱정하는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야. 미국이 어깃장을 놓으면 한국 경제는 와장창 무너질 수 있어. 결정적 위기 때 한국 경제의 명줄을 쥔 나라는 미국이야. 그에 비하면 중국의 보복은 참을 만해.

자, 이제 결론을 말할게. 눈치 챘겠지만 나는 철저한 실리주의자야. 그 점에서 사드 배치는 불가피한 선택이야. 은혜를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 편에 서는 것이 국익에 플러스라고 보기 때문이야. 통일 전엔 더더욱. 김진명이라는 소설가가 "북한이 침공하면 우리와 같이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미국"이라고 했다던데, 탁견이로고. 훗날 중국에 안보를 의지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몰라. 누구 편에 설지는 그때 가서 결정하면 돼. 파트너 교체 시기는 점차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냐.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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