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주영 칼럼]

개편 없는 세제개편안

지령 5000호 이벤트

하루 1000억원씩 적자 나는데 대선 앞두고 세금 깎아줄 궁리만
복지수요 뒷감당 어찌 할 건가

지난해 나라살림은 하루 대략 1000억원씩 적자가 났다. 나라 재정이 아직은 건전한 편이라고 하나 하루 1000억원씩의 적자는 결코 적은 수준이 아니다. 노무현정부 시절 재정적자는 연간 2조원 안팎으로 거의 균형재정이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면서 급증해 지난해에는 38조원으로 불어났다. 나라살림의 적자 구조를 균형재정으로 되돌리는 것은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하지만 정부가 지난주 발표한 세제개편안에는 그런 노력이 전혀 안 보인다.

올해 세제개편의 가장 핵심적 과제는 증세와 소득세제 개편이다.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증세가 필요하고, 조세의 기본원칙에 어긋나는 소득세를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근로소득세 면세자 비율이 48.1%나 되는 현행 소득세제는 한마디로 기형이다. 납세 대상자의 거의 절반이 면세되는 세금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국민의 납세의식을 해친다. 세금을 면제받은 사람들조차도 득보다 실이 많다. 소액의 금전적 혜택을 얻는 대가로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이나 소속감, 책임감 등 소중한 정신적 가치를 누릴 기회를 빼앗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평과세는 부자에게 더 높은 세율로 누진과세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득이 낮은 계층에 적은 금액이라도 소득의 크기에 합당한 세금을 물리는 것을 포함한다. 요컨대 국가에 소속된 구성원인 이상 모든 국민은 소득이 있으면 금액의 다과를 불문하고 일단 한푼이라도 세금을 내게 하는 것이 원칙이다.

의류업자들이 제철에 안 팔린 재고를 처분할 때 '왕창세일'을 한다. 나라 세금도 의류업자들이 하는 것처럼 '왕창세일'을 하는지 묻고 싶다. 소득세 징수액은 연간 60조원 정도로 단일 세목으로 가장 크다. 그런데 감면액이 거의 20조원으로 징수액의 3분의 1이나 돼서 하는 얘기다. 조세정책은 나라의 토대를 지탱하는 국정의 기초다. 조세정책을 이런 식으로 운용하는 것은 나라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올해 세법개정안을 보면 정부가 이런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인 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우려된다.

박근혜정부의 조세정책이 이처럼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왜곡된 것은 정부와 정치권의 포퓰리즘 탓이 크다. 그 뿌리는 지난 대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근혜 후보가 내세운 '증세 없는 복지' 공약은 세금 포퓰리즘의 전형이었다. 그 대가는 컸다. 박 대통령은 '증세는 없다'는 도그마에 묶여 집권 기간 내내 심각한 재정결핍에 시달려야 했다. 증세를 하지 못하니 누리과정 예산을 지원해줄 수 없었고, 그 결과 현재까지도 교육지자체들과 극도의 갈등을 빚고 있다. 지난해 세금폭탄 논란을 야기한 연말정산 파동도 꼼수 증세를 해보려다 탈이 난 경우다.

포퓰리즘이 선거에서 표를 얻는 데는 다소 도움이 됐을지 모르지만 집권 후 국정을 운영해 나가는 데서는 건건이 발목을 잡았다. 이번 세제개편에서도 마찬가지다. 급증하는 복지수요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매년 세수기반을 착실히 확충해 나가야 한다. 우리나라는 복지수요가 현실화하는 초입에 와 있을 뿐인데 재정적자가 급증하고 있다. 앞으로 복지수요가 본격화하면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때에 대비해 지금부터라도 착실히 준비를 해나가야 한다. 증세와 비과세감면 축소, 소득세제 정상화 등의 세제개혁이 시급한 상황이다.

그러나 '증세 없는 복지' 공약이 발목을 잡고 있고, 연말정산의 악몽이 마음을 잡고 있다. 증세는 공약 때문에 안했고, 비과세감면 제도를 축소.정비하는 일은 겁이 나서 못했다.
그러는 사이 국가재정은 갈수록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박근혜정부의 조세정책은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래서 올해 세제개편안은 '개편 없는 세제개편안'이 돼버렸다. 지금이라도 나라의 재정 상황을 국민에게 소상히 설명하고 정면돌파하는 쪽을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y1983010@fnnews.com 염주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