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 칼럼] 필리핀의 전력난과 한국의 누진제

양형욱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8.25 16:57

수정 2016.08.25 16:57

[데스크 칼럼] 필리핀의 전력난과 한국의 누진제

지난 22일 필리핀으로 출장을 갔다. 필리핀 마닐라를 경유해 오로라주로 향하던 항공기에서 내려다본 현지 야경은 황홀했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형형색색 보석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모습이다. 유독 불빛들이 반짝거려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그러나 공항에 도착해 만난 현지 한국기업 주재원은 뜻밖의 얘기를 들려줬다. 필리핀의 야경이 유독 아름다운 것은 전력난 때문이라는 게 골자다.
전력공급이 원활치 못해 불빛이 반짝거려 밤엔 유독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 필리핀 수도인 마닐라 변두리에서는 연일 정전이 발생하고 있다. 전기요금도 비싸다. 이곳에선 무더위에 에어컨을 장시간 틀었다간 수십만원의 전기료를 부담하는 게 예삿일이다.

오죽하면 필리핀 정부는 지난해 5월 '복싱영웅' 매니 파키아오와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 간 세기의 복싱대결 때 정전사태를 우려해 전기사용을 자제해달라고 당부했을 정도다. 1억명이 넘는 필리핀 국민의 시선이 파키아오와 메이웨더 주니어 경기의 TV 중계방송에 몰리면 전력 공급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질 수 있어서다. 그만큼 필리핀이 심각한 전력난에 시달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일단 필리핀의 만성적 전력난은 발전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 기인한다. 필리핀은 전력 공급의 50% 이상을 석탄과 디젤 발전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석탄과 디젤발전은 전력수요 대비 공급량이 부족한 실정이다. 그마저도 발전원료 수급 차질과 환경오염 우려로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사실 필리핀이 전력난에 빠진 결정적 발단은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필리핀은 마르코스 정권 시절인 1976년 바탄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다. 우리나라가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한 것과 비슷한 시기다. 이 원자력발전소는 완공 이후부터 현재까지 개점휴업 상태로 가동하지 못하고 있다. 환경단체들이 반발하는 데다 지진 발생 시 안전성이 우려돼서다. 지난 1986년 발생한 체르노빌 원전 사고도 바탄 원전 가동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최근 필리핀 정·재계 일각에서는 전력난을 견디다 못해 바탄 원전 가동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바탄 원전 가동은 10억달러 이상의 예산을 확보하는 게 관건이다. 환경단체의 반발도 넘어야 할 산이다.

문득 필리핀의 전력난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전기료 누진제 논란이 떠올랐다. 우리나라는 필리핀과 비슷한 시기 원전을 건설하기 시작해 전체 발전의 3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필리핀은 원전을 비롯한 발전소가 부족해 전기료가 비쌀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원전을 비롯해 충분한 발전시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원전은 25기다. 이에 더해 우리나라는 원전을 33기로 늘리기로 했다. 한국전력은 올 상반기에만 6조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연중 전기 사용량이 집중되는 여름철만이라도 전기료 누진제를 완화할 만한 여유가 있다. 그게 체르노빌 원전 사고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공포 속에서도 원전 건설을 양해해 준 지역주민과 국민에 대한 배려다.
지금처럼 전기료 폭탄이 앞으로도 지속된다면 어느 누가 자신의 앞뒤 마당에 원전을 지으라고 허용하겠는가. 끝으로 정부와 정치권에 '하고 싶은 일에는 방법이 보이고, 하기 싫은 일에는 변명이 보인다'는 필리핀 속담을 들려주고 싶다.

hwyang@fnnews.com 양형욱 산업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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