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순의 느린 걸음]

케이블TV 일병 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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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최전선 전장에 있는 일등병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특수부대가 구성된다.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전쟁터에서 한심하게 보일 수 있는 임무지만, 그 임무에는 명분이 있다. 전쟁에 참여한 한 집안의 4형제 중 3명이 죽고 막내 한 사람만 살았는데, 그 막내라도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얘기다.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 감동했었다.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의 인수합병(M&A)이 공정거래위원회의 불허로 무산된 이후 국내 미디어 산업을 활성화할 방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동통신과 케이블TV 시장 1위 사업자들이 M&A를 통해 자발적으로 산업을 재편해야 한다고 나설 만큼 국내 미디어 산업은 대수술이 필요했다.

객관적으로는 경쟁력이 높아 보이지 않는 지상파방송이 미디어 시장을 주도하고 있고, 케이블TV·위성방송·인터넷TV(IPTV)로 잘게 쪼개진 유료방송 산업은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없다. 방송 시장에 발을 들여놓기 어려운 통신사업자들은 미디어 분야에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는 게 시급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M&A는 무산됐고, 자발적으로 개편하지 못한 미디어 산업의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방안을 찾는 일이 업계와 정부에 숙제로 남았다.

그런데 가만 보면 요즘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분명 고민의 시작은 미디어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는데, 정작 고민의 주체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케이블TV 업체를 살리기 위한 방안을 찾고 있다. 주무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는 유료방송산업 활성화 방안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정책논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케이블TV 사업자 지원책을 만들고 있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케이블TV 업계 관계자들을 만나보면 "정부가 M&A를 막았으니, 뒷일은 정부가 책임져라"라고 요구하는 듯한 느낌을 자꾸 받는다. 그러면서도 정작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얼마를 투자하겠다거나 어떤 새 사업을 찾겠다거나 하는 계획을 내놓은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잠깐만 생각해보자.

라이언 일병이 국가를 향해 "국가가 우리 4형제를 전쟁에 불러 형들이 모두 죽었으니 나만이라도 살려보내라"고 요구했다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스토리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정부가 그 요구를 받아들여 라이언을 구하러 나섰다면 수백, 수천의 다른 라이언 일병들은 전쟁의 임무를 수행했을까.

정부가 고민할 숙제는 케이블TV 사업자 구하기인가, 한국 미디어 산업의 경쟁력 제고 정책인가?

케이블TV 사업자들은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요구하기에 앞서 국내 미디어 산업의 주도세력으로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얼마나 투자하고 노력했는가?

우리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케이블 일병 구하기'가 아니라 '한국 미디어 산업 구하기'라야 맞는 것 아닐까 싶다.

cafe9@fnnews.com 이구순 정보미디어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