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 칼럼] ‘고산자’와 ‘밀정’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9.11 17:20

수정 2016.10.02 17:48

[데스크 칼럼] ‘고산자’와 ‘밀정’

가을이다. 계절의 변화는 뺨을 스치는 바람에서만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거리로 쏟아져나온 사람들의 옷매무새만 봐도 이미 가을이 저만치 와있음을 알 수 있다. 계절마다 다른 상품(작품)을 내놔야 하는 극장가도 마찬가지다.

지난 주말을 기점으로 극장가는 간판을 죄다 바꿔달았다. 지난 여름시즌을 뜨겁게 달궜던 '부산행' '인천상륙작전' '덕혜옹주' '터널' 등이 일제히 자취를 감추고 추석연휴를 겨냥해 만든 '고산자, 대동여지도'와 '밀정'이 나란히 관객을 찾아왔다.
개봉 첫 주의 흥행성적만 놓고 보면 '밀정'의 완승이 점쳐지지만, 그렇다고 '고산자'가 엄청나게 재미없거나 작품성이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고산자'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를 주인공으로 한 강우석 감독의 첫 사극이다. '투캅스' '공공의 적' '실미도' 같은 영화를 만들며 충무로 대중영화의 '맏형' 노릇을 톡톡히 했던 강 감독은 정공법을 선택했다. 김정호가 두 발로 직접 밟고 다녔을 우리나라 곳곳의 아름다운 풍광과 강 감독 특유의 뚝심을 드라마 곳곳에 풀어놓으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던 한 인간의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삶을 꾸밈없이 보여준다. 언뜻 감독은 "아직 가지 않은 길이 나의 갈 길"이라며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나가는 김정호의 고집스러운 집념이 예술(영화)하는 자의 마음가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런 점에서 영화 타이틀이 올라오기 전 5분여간 전개되는 첫 시퀀스는 이번 영화의 고갱이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이 5분을 지루해할 수도 있겠지만 연분홍빛 꽃이 만개한 황매산과 꽁꽁 얼어붙은 북한강, 제주에서 바라본 마라도와 푸른 하늘을 비추는 백두산 천지 등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생짜로 보여준 이 5분에서 나는 감독의 진심이 느껴졌다. 다만 영화의 잔재미를 위해 간간이 뿌려댄 양념(유머 코드)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면서 젊은 관객들과 소통하지 못한 건 못내 아쉽다.

잔재주 없이 진득한 화면과 이야기를 보여주는 '고산자'에 비하면 '밀정'은 꽤 세련된 면모를 드러낸다. '반칙왕' '달콤한 인생'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같은 영화를 만들었던 김지운 감독은 이번에도 그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만듦새를 보여주며 극장가를 장악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함과, 친일과 항일의 경계선에서 갈등하는 극중인물들의 이중심리가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며 관객을 어두운 극장 안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형국이다. 또 혼란의 시대에 밀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의 혼돈과 그 인물들을 통해 드러나는 시대의 혼돈이 관객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김지운 감독의 페르소나인 송강호의 빛나는 연기도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분명 악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선인인 것도 같은 극중의 이정출 역을 누가 했을까 싶을 정도다. 그가 조선인 일본 고등경찰 이정출의 얼굴로 실어나르는 곤혹스러움과 의심, 분노, 슬픔 등 다양한 얼굴 표정은 단 한순간도 관객의 마음을 놓아주지 않는다.
유독 긴 이번 추석연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영화 한 편 골라 극장나들이를 떠나보는 건 어떨까 싶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문화스포츠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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