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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경제학과 행복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9.21 17:36

수정 2016.09.21 17:36

[fn논단] 경제학과 행복

경제학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지향점은 무엇일까. 윤택하고 행복한 삶일 것이다. 인간의 행복은 단지 먹고사는 일에 국한된 것이 아닐진대 이제까지 경제학의 논의는 주로 물질적인 일에 머물러 왔다. 이런 문제를 꿰뚫어 보고 생활경제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선비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풍석 서유구였다.

그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먹고사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으며, 뜻을 세우고 인생을 즐기는 것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서유구는 홍만선이 쓴 '산림경제'를 본받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썼다. 여기에 먹고사는 식력(食力) 외에 뜻을 기르는 양지(養志) 부분을 크게 보완함으로써 조선의 생활경제학을 집대성했다.


논밭 갈고 과수 재배하며, 누에 치고 베를 짜며, 사냥하고 가축 치며, 음식 만들어 몸보신하고 병 수발 위해 약재를 갖추는 일은 먹고사는 데 필수적인 일이다. 또 터를 살펴 집을 마련하며, 재산을 늘려 생계를 경영하고, 편리한 도구와 가구를 마련하는 일 역시 먹고살기 위해 반드시 몸에 익혀야 할 지식이다. 그러나 시골 선비라 해서 어찌 배 채우는 일에만 급급할 수 있겠는가. 정원을 만들어 화초를 가꾸고 연못을 파서 자연을 즐기고, 독서와 활쏘기로 심신을 단련하며, 관혼상제 행사에 예의와 격식을 갖추는 일 또한 가벼이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시와 술을 즐기고 글씨와 그림 그리는 법을 익히며 예술품을 감상하고 명승지를 여행하는 등의 여가생활을 즐기는 일 역시 필요하다. '임원경제지'에는 바로 이런 내용까지 담겨 있다.

서유구는 여러 대에 걸쳐 한양에서 중요한 벼슬을 한 '경화세족'의 집안에서 1764년 태어났다. 그는 27세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고 정조의 사랑을 받으며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조가 죽고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그의 집안에도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1806년 작은아버지가 유배되자 그도 식솔을 거느리고 농촌으로 물러났다. 이로부터 18년간 그는 금화, 대화 등 여섯 군데를 옮겨다니며 농사를 짓고 '임원경제지'를 쓰기 시작했다. 1823년 정계에 복귀해 전라관찰사, 수원유수 등의 벼슬을 지내며 책을 계속 써나갔다.

1845년 서유구는 죽기 전 113권 52책, 250만자에 달하는 방대한 '임원경제지'를 완성했다. 그동안 책을 쓰고 정리하는 데 외아들 서우보의 도움을 받았는데 책이 마무리되기 전에 아들과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그는 애끊는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수십년에 걸쳐 저술에 공을 들여 '임원십육지' 백여권을 최근에야 겨우 끝마쳤으나 책을 맡아 보관할 자식도 아내도 없으니 한스럽구나. 우연히 웅집역(熊執易)의 사연을 보니 구슬퍼져 한참 동안 눈물이 흘러내린다.
"

필생의 역작이었건만 그의 책은 출간되지 못했다. 워낙 내용이 방대하다 보니 필사본마저 겨우 4질 전해올 따름이다.
단지 10여년간 각고의 작업을 거쳐 60여권 분량의 완역본이 수년 내 출판될 것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이호철 한국IR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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