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세계 석학에 듣는다] '현금'을 줄이자

송경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09.23 17:39

수정 2016.09.23 17:39

케네스 로고프 美 하버드 공공정책대학원 교수
[세계 석학에 듣는다] '현금'을 줄이자

세계는 지폐로 넘쳐난다.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매년 수천억달러를 찍어내고 있다. 주로 100달러 지폐 같은 최고액권이다. 100달러 지폐는 무려 4200달러에 이르는 미국의 일인당 현금 공급규모의 80% 가까이를 차지한다. 1만엔짜리 지폐는 일인당 현금 보유규모가 7000달러에 육박하는 일본 전체 통화의 약 90%를 차지한다. 이 모든 현금은 주로 불법적인 지하경제 성장을 부추기고 있다.


그렇다고 현찰 없는 사회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가까운 시일 안에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찰이 적은 사회는 더 공정하고 더 안전한 곳이 될 수 있다.

합법 경제에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직불카드, 전자이체, 휴대폰 결제 성장과 함께 현금 사용이 줄고 있다. 특히 중대형 거래가 그렇다. 중앙은행 설문조사들에 따르면 일반인이나 기업들이 보유하고 사용하는 고액권 비중은 낮다.

현찰은 범법을 쉽게 해준다. 현찰에는 이름이 안 써있기 때문이다. 고액권이 특히 문제인데 운반도 쉽고 감추기도 쉽다.

물론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금융범죄를 저지르고, 세금을 포탈하는 현금 아닌 방법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대부분은 (일례로 다이아몬드 원석처럼) 거래비용이 지나치게 높거나 (은행 이체 또는 신용카드처럼) 노출 위험이 높다.

비트코인 같은 뉴에이지 가상화폐는 노출에 철저히 취약하지만 않으면 그 대용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가치는 급격히 출렁거리고, 각국 정부가 그 사용을 규제할 많은 수단을 확보하고 있다. 예컨대 가상화폐를 은행이나 소매점에서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것들이다. 현찰은 유동성에서 독보적이고 거의 모든 곳에서 통용된다.

세금회피에 따른 손실만 해도 엄청나다. 미국에서만 매년 7000억달러로 추정된다. 세율이 높은 유럽에서는 이를 능가할 것이다. 범죄와 부패는 비록 계량화가 어렵지만 이보다 더 높은 비용을 유발할 것이 거의 틀림없다. 마약, 밀수는 물론이고 인신매매, 테러, 강탈 등도 생각해보라.

게다가 고용주가 고용서류 없이 현금 지급을 통해 노동자를 고용하는 것은 불법이민의 주된 동력이 되기도 한다. 현금 사용을 줄이는 것은 가시철조망보다 이민을 제한하는 훨씬 더 인간적인 방법이다.

각국 정부가 현금 발행에서 비롯되는 이윤에 너무 취해 있지만 않았다면 이런 비용을 인식했을 것이다. 일부 진전이 있기는 하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최근 500유로 지폐를 점차 퇴출시킨다고 발표했다.

물론 현금은 일상의 소액거래와 사생활 보호 측면에서는 여전히 중요하다. 현 상태를 선호하는 북유럽 중앙은행 관리들은 러시아 소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를 인용하기를 즐긴다. "돈은 주조된 자유다." 도스토옙스키는 현대 자유국가가 아닌 19세기 중반 차르 치하 감옥에서의 삶을 언급한 것이지만 북유럽인들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문제는 현 시스템이 제대로 균형 잡힌 것이냐 하는 것이다. 분명 그렇지 않아 보인다.

현금 사용 억제계획은 3가지 원칙을 따라야 한다. 우선 일반 시민이 편리하게 현금을 계속 사용하고, 적절한 수준에서는 익명의 구매가 가능토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대규모의 반복적인 도매 수준의 익명거래를 거듭하는 기업 모델은 억제해야 한다. 두번째로 어떤 계획이건 매우 점진적으로(10년 또는 20년에 걸쳐) 서서히 적용토록 하고, 예상치 못한 문제가 불거지면 중간에 수정도 해야 한다. 그리고 세번째로 개혁은 저소득가구, 특히 은행 계좌가 없는 이들의 요구를 민감히 받아들여야 한다.
현금 축소가 범죄와 세금회피를 종식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하경제가 더 위험하고 유동성이 더 낮은 지급수단을 동원토록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현금은 현대 하이테크금융 세계에서는 비중도 낮고 덜 중요할지 모르지만 그 대부분을 서서히 퇴출시키는 이득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클 것이다.

정리=dympna@fnnews.com 송경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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