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 칼럼] 정부, 정확한 ‘규제의 지도’ 만들라

양형욱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10.02 16:47

수정 2016.10.02 16:47

[데스크 칼럼] 정부, 정확한 ‘규제의 지도’ 만들라

조선 후기 홍경래 난이 일어났다. 김정호의 아버지는 추운 겨울에 동료들과 함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산 속으로 향했다. 김정호의 아버지는 어설픈 지도와 나침반에 의지해 산속을 헤맸다. 그러나 김정호의 아버지와 동료들은 애초 잘못 만들어진 지도로 인해 산속에서 길을 잃어 전원 동사했다. 김정호는 아버지가 숨을 거두면서까지 손에 쥐고 있던 나침반을 유품으로 건네 받았다. 김정호는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정확한 지도를 그리려는 열망을 품게 된다.
김정호는 '지도를 만드는 이유가 가슴이 뛰기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로 일생을 지도에 바쳤다. 그는 걸어서 조선팔도를 세 번 돌았다. 백두산에도 열덟 번 올랐다. 조선시대 최고의 실측 대축적 전국지도인 '대동여지도'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가 백성을 위해 활용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통해 권력을 차지하려는 무리들과 대립한다. 일련의 내용은 '고산자 김정호'라는 영화의 줄거리다.

정부가 글로벌 가구기업인 '이케아'의 말름서랍장 쓰러짐(전도) 현상을 처리하는 과정을 보면서 고산자 김정호란 영화를 떠올리게 됐다. 최근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국가기술표준원은 이케아 서랍장 15종을 판매 중지시켰다. 여기까진 논란이 크지 않았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국표원이 국내 6개 회사의 12종 서랍장까지 판매를 중지시킨 것이다. 논란은 국표원이 국내에 서랍장 쓰러짐 현상과 관련된 기준이 사실상 없는 상황에서 미국재료시험학회(ASPM)의 기준을 근거로 판매중지를 결정한 대목에서 불거졌다. 마치 국내에서 만든 지도가 없어 청나라에서 만든 지도를 근거로 통행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는 판결을 내린 형국이다. 가구기업들은 "지도에도 없는 길을 갔다는 이유로 '불량 가구 기업'으로 낙인 찍히는 것은 과도한 규제"라고 발끈하고 있다.

그렇다면 국표원이 잣대로 삼은 미국 ASPM의 기준은 정확한가. 이 기준은 미국 5~8세 아동의 평균 몸무게인 23㎏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우리나라와 미국 아동의 몸무게에는 차이가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가구 안전성 기준이 달라야 하는 이유다. 국내 가구기업 중 한 곳은 아동의 기준인 10~20㎏을 기준으로 내부에서 가구 쓰러짐 시험을 해왔다. 그 결과 20㎏ 이하에서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23㎏ 이상에서 가구 쓰러짐 현상이 발생했다. 그간 멀쩡했던 가구가 미국 잣대를 적용해 불량제품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물론 소비자 안전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 소비자 안전을 위해 해외 기준이라도 가져오는 조치를 취한 취지도 안다. ASPM이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국제 표준단체인 것도 맞다.

그러나 아무리 급해도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일관성 있는 근거도 뒷받침돼야 한다.
그래야 뒤탈이 없고, 신뢰성도 높아진다. 김정호의 아버지가 현실에 맞지 않는 지도로 인해 길을 잃어 목숨을 잃었듯, 정부가 현실적인 기준을 만들지 않는다면 해당 기업들은 우왕좌왕할 수 있다.
정부는 기업을 규제하기 전에 합당한 '규제의 지도'부터 정확하게 만드는 게 순서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hwyang@fnnews.com 양형욱 산업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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