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사설

[fn논단] 교환의 거부

김충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10.05 16:59

수정 2016.10.05 17:09

[fn논단] 교환의 거부


예부터 처가와 화장실은 멀수록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신부는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낯설디 낯선 신랑의 집으로 먼길을 떠나야 했다. 딸을 보내는 어머니의 억장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혼례 날 눈물바다를 이루지 않은 집안이 없었다. 가을이 무르익는 요즈음, 여기저기 앞다투어 결혼식 청첩장이 날아온다. 그렇지만 그 풍경은 사뭇 달라서 예전의 결혼식장을 가득 채웠던 석별의 정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기껏 해야 1~2시간 정도 거리에 처가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석별의 정은커녕 즐겁고, 나아가 기기묘묘한 결혼식 행사들이 하객들을 즐겁게 하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부터 붐을 이뤘던 아파트 문화는 날개가 돋쳐서 이제는 아파트 아닌 주거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니 처가와 함께 멀수록 좋다고 하던 그 화장실이 이제는 모두 집안으로 들어와 방과 더불어 아니 방보다 더 비중 있게 집안의 미용공간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멀어야 좋다는 처가와 화장실이 이처럼 근접거리에 존재하게 됨에 따라 우리네 삶의 규칙도 바뀌게 되었다. 처가의 분리가 교환에 의한 호혜적 이익의 근거이고 화장실의 분리가 그 처가의 분리를 강조하기 위한 비유적 표현이라면, 처가의 분리는 단순히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규칙 혹은 삶의 윤리를 결정하는 주요한 교환적 의미를 띤다고 할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그 처가의 분리를 근친상간의 방지와 교환의 이익으로 설명한 바 있다.

이렇게 보면 윤리란 시대를 초월한 절대불멸의 정신적 명령이 아니라 혈족의 물리적 분리를 통한 사회적 질서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물리적 분리 현실과 그 환경이 변화된다면 그 변화된 분리 현실과 환경을 반영해야 하는 윤리도 변해야 하는 법, 오늘날의 점증하는 그 모든 가족적 비극도 따지고 보면 다 이렇게 분리돼야 할 환경이 서로 근접하게 됨에 따라 발생한 것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주구검이라고나 할까. 이번 추석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특히나 명절을 맞아 그 수나 정도에 있어 보다 더 과도한 비극이 발생한 이유도 명절이 과거의 윤리를 강요하는 가장 응축된 현실이기 때문일 터이다.


결혼 기피와 이혼율 급증, 나아가 '부모자식'이나 '부부' 간의 폭력이거나 점증하고 있는 황혼이혼의 현실, 부모 부양과 관련한 첨예한 갈등 등 이 모든 일상적 현상들이 과거엔 찾아볼 수 없었던 엄청난 가족적 위기들인 것만은 분명한데, 그렇다고 이러한 가족적 혼란이 가족윤리의 금기인 '동일혈족 내 교환의 금지'를 어기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혈족의 물리적 분리 원칙도 붕괴되고 있고, 혈족에서 개인으로 교환단위가 축소되고 있으며, 또 그 교환이 호혜적 이익을 낳는 것도 아니라면 굳이 교환을 지향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들이 점점 더 세를 얻고 있다.
이러한 '교환의 거부'라는 전대미문의 현실에 직면하여 우리 사회는 어떤 윤리적 원칙을 모색해야 할 것인가가 이제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고 하겠다.

김진기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