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데스크 칼럼] 두테르테와 한국

김규성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10.30 17:49

수정 2016.10.30 17:49

[데스크 칼럼] 두테르테와 한국

필리핀이 국제뉴스에 이처럼 자주 등장한 적은 없었다. 필리핀은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는 한국을 앞섰다. 6.25전쟁 땐 한국에 파병도 했고 아시아개발은행(ADB) 본부를 수도 마닐라에 유치할 정도로 아시아 중심국가였다. 미국의 식민통치를 받은 국가여서 미국 주도의 세계 정치.경제체제에서 갖는 이점도 많았다. 하지만 장기간 이어진 독재, 뒤이은 정정불안, 경제난 등으로 주목할 필요가 없는 국가가 됐다. 세부 등 유명 관광지를 이야기할 때만 필리핀이 등장할 정도였다.


잊혀졌던 필리핀이 아시아를 흔들고 있다. 지난 6월 말 취임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행보 때문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거침없는 언행으로 유명했다. '범죄자를 모두 처형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두테르테는 자신의 말처럼 취임 후 100일 동안 마약 관련 범죄자 3500명 이상을 처형했다.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즉결심판에 국제사회의 인권유린 비판은 거셌지만 현재까지 꿋꿋이 밀어붙이고 있다. '마약과의 전쟁'에 이어 지난 10월 11일에는 '담배와의 전쟁'도 선포했다. 사실 아시아를 뒤흔들고 있는 부분은 필리핀 국내 이슈가 아닌 두테르테의 외교 동선이다. 아시아, 나아가 미국과 중국이 포함된 세계 지형을 요동치게 만들 조짐이어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정부 외교정책의 핵심은 '피봇투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로 중심축 이동)'다. 미국 외교정책에서 (중동보다) 아시아를 더 중시하겠다는 뜻이다. 정치·경제적으로 세를 불리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배경이다. 피봇투아시아 정책의 핵심국가인 필리핀은 중국이 해양 확장을 위해 꼭 넘어야 하는 남중국해를 끼고 있다. 더구나 최근 국제중재재판소도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을 부인하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그런 필리핀이 '피봇투차이나', 다시 말해 중국으로 중심축을 이동하겠다고 공개 선언을 했다. 지난 20일 두테르테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전후해 미국과 결별 선언까지 했다. 두테르테는 나아가 러시아와 관계 개선까지 모색하겠다는 공개적 구애도 서슴지 않고 있다. 지난 25일에는 일본도 방문, 아베 신조 총리와 정상회담도 했다. 두테르테의 발언은 '갈지자(之)'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인터뷰에서 "미국과 결별 선언은 마약과의 전쟁을 비판하는 미국에 '말대답'을 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며 "필리핀 정부와는 상관없는 개인적 인식"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아베 총리와의 도쿄 정상회담에선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과 관련, 일본의 입장을 지지할 것이라고도 했다. 베이징에서 한 말을 뒤집었다.

혼란스럽지만 이전보다 필리핀과 미국의 관계는 약화될 것이 확실하다. 다른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도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방향은 필리핀과 같은 가능성이 높다. 지리·문화의 인접성을 기반으로 경제력까지 가미된 중국의 구심력이 강해 쏠림이 불가피해서다. 아·태 국가와 달리 강한 군사동맹으로 묶여 있는 한국도 '두테르테 외교'가 던지는 첫 숙제를 이미 받았다.
북핵을 막기 위한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미·중 사이에서 한바탕 홍역을 치렀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두테르테의 질문은 한국에서도 여전히 진행형이고, 미국 대선이 끝난 후 엄청난 부담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숙제다.
미.중을 사이에 두고 '줄타기 외교'에 나선 두테르테의 행보를 주의깊게 봐야 할 이유다.

mirror@fnnews.com 김규성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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