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주영 칼럼]

배신의 정치

헌법이 정한 국가시스템을 대통령 스스로 무너뜨리고 숨긴 것에 국민들 분노해

"보고서를 두고 가시라고 합니다."

장관이 역점 사업들에 관한 보고서를 싸들고 대통령 집무실에 갔는데 비서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면 어떨까. 김이 팍 샐 것이다. 한두 번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계속 되풀이된다면 비정상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이 핵실험을 두 번이나 하고, 미사일을 수도 없이 쏘아 대는데 1년 동안 외교안보수석을 한 번도 독대하지 않았다. 국회나 야당과의 관계가 삐걱거리는데도 11개월 동안 정무수석은 대통령을 독대하지 못했다. 경제부총리는 경제가 중병에 걸려 있는데도 한 달 이상 대면보고를 못했다.

박 대통령과 함께 일한 장관과 청와대 수석들은 참 일할 맛이 안 났겠다 싶다. 나는 한·미 양국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합의한 내용을 발표하던 시간에 외교부 장관이 왜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이런 구조에서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대통령이 국사를 비대면으로 간편 처리하는데 장관이나 수석들이야 초간편 처리하지 않았을까. 박근혜정부의 국정운영은 나사가 풀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빠져버린 것이다.

독대는커녕 대면보고조차 못하는 장관들은 퍽 궁금했을 것이다. 대통령은 책임자인 나를 제치고 누구와 국정을 상의하실까. 장관쯤 되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으리라 짐작된다. 알려고 하면 다쳐. 모른 척하고 넘어가자. 이런 생각에서 쉬쉬하며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검찰이나 경찰, 국정원 등 정보기관의 고위직, 청와대와 여당의 실세들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모두가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은 은유화법으로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지만 대통령의 눈 밖에 나서 내쫓기는 마당에 간언이 통할 리 없었다. 한 번 더 기회가 있었다.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우병우 민정수석을 내사했을 때다. 대통령은 그 기회도 잡지 않았다. 대신 이 특별감찰관을 내치고 검찰 수사를 받게 했다. 누구든지 어둠의 성역에 감히 촉수를 내밀면 무사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국정을 이끌어가는 일은 참모들과 얼굴을 맞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얼굴을 맞대고 대화와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표정과 목소리, 심지어 단어 한마디와 토씨 하나까지도 소통과 추진력의 원천이 된다. 담당 수석을 하루 몇 번씩이라도 불러 얘기를 듣고, 주무 장관을 불러 세세한 사항까지 지시하는 것이 대통령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진정으로 국정을 걱정하는 대통령이라면 이래야 했다.

어둠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는 국민이 무섭지 않은 대통령을 뽑았다는 사실을 얼마 안가 알게 됐다. 그래서 분노가 폭발했다. 수많은 시민들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대통령 하야를 외치고 있다.

대통령은 헌법이 만들어놓은 국가운영 시스템을 멀리하고 최순실이란 사설(私設) 시스템을 가까이 했다. 그 결과 국정을 보좌하고 감찰하는 시스템이 모두 망가졌다.
그 틈새로 최순실 사단이 끼어 들어 국정을 농단했다. 박 대통령은 여러 번 배신의 정치를 언급하고 주변의 정치인을 배신자로 몰았다. 그러나 정작 국민을 배신한 사람은 대통령 자신이 아닌가. 성난 민심을 거스르지 말고 순응하는 길을 찾기 바란다. 헌정중단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y1983010@fnnews.com 염주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