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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훈 칼럼] 5共 뺨치는 기업 갈취

이재훈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6.11.09 17:19

수정 2016.11.09 17:19

미르.K재단, 일해재단의 데자뷔
국가권력 앞세운 '돈뜯기' 극성.. 준조세 막을 제도 보완 시급
[이재훈 칼럼] 5共 뺨치는 기업 갈취

"30여년 전 5공화국 때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아니, 수법의 대담함과 무지막지함은 오히려 5공을 능가한다. 권력이 기업을 돕지는 못해도 해코지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최순실 일당'이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과 각종 이권 챙기기 과정에서 대기업들을 마음껏 농락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자 한 대기업 임원은 이렇게 평가했다. '기업은 권력의 영원한 봉'이라고 하지만 군사정권 뺨치는 박근혜정권의 '삥뜯기'와 기업 팔비틀기 수법에 모두들 충격받았다.

미르.K스포츠 재단 모금에 청와대가 나서 기업들을 다그쳤고, 박근혜 대통령까지 7개 그룹 총수들을 독대하며 손을 벌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렇게 해서 774억원을 모았다. 최순실 측은 SK.롯데.포스코.부영 등 약점이 있는 대기업에는 거액의 추가 출연을 요구했다. 이처럼 거칠고 노골적인 방법으로 돈을 뜯은 정권은 없었다.

밉보인 기업인을 찍어내는 수법은 조폭을 방불케 한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미르.K스포츠재단 기부에 소극적이었고, 최씨 관련회사에 올림픽 시설공사 일감을 주라는 요구를 거절한 탓에 지난 5월 갑자기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에서 '해고'됐다. 국내 최대 해운사인 한진해운의 법정관리 결정도 권력의 보복이라는 관측이 파다하다.

정권이 멀쩡한 기업 오너를 물러나라고 강요했다는 사실은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2013년 말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이 이미경 CJ 부회장의 경영일선 퇴진을 요구했다는 것인데 녹취록에 담긴 협박 내용이 가관이다. "너무 늦으면 진짜 저희가 난리가 납니다. 그냥 쉬라는데요,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합니까." 이 부회장이 '광해' '변호인' 등 좌파성향 영화를 많이 만들고, '문화계 대모'로 군림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런 이유로 민간기업 경영권까지 손대는 것은 3공, 5공 때도 보지 못했다. 나는 이 사건에서 박근혜정권의 폭력성을 실감한다.

미르.K스포츠재단은 전두환정권의 일해재단과 절묘하게 오버랩된다. 일해재단은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테러사건의 희생자 가족을 지원할 목적으로 설립됐으며 1987년까지 598억원을 모금했다. 대다수 기업이 군소리 없이 돈을 냈으나 1988년 국회 청문회에서 강제모금의 실체가 드러났다.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은 "나중에는 (억울했지만) 내는 게 편할 것 같아 냈다"고 증언했다. 재계 7위의 국제그룹은 돈을 적게 냈다가 1985년 공중분해됐다. 모금 총책이 장세동 당시 경호실장에서 안종범 수석으로, 엉뚱한 피해자는 양정모 회장에서 조양호 회장으로 대체됐다.

검찰은 돈을 낸 대기업들을 전수조사하고 총수까지 소환할 움직임이다. 기업들도 더 이상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지 말고 이참에 진상을 확실히 밝혀 고질적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맞는 말이지만 정경유착을 없애기가 그리 쉬울까.

이 나라의 기업은 권력의 요구에 불응할 수가 없다. 지난해 기업이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낸 기부금만 6조4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권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봐야 한다. 권력이 각종 인허가권, 수사권, 세무조사권 등 막강한 무기를 틀어쥐고 있는 한 기업 갈취는 사라지기 어렵다.
권력의 분산과 함께 기부금 등 준조세 항목을 법으로 규정하고 법에 없는 준조세는 일절 금지하는 '준조세 김영란법' 같은 입법이 따라야 한다.

ljhoon@fnnews.com 이재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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