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리포트]

침묵에서 깨어난 미국의 다수

미국 정치권에서 공화당은 빨간색, 민주당은 파란색으로 표기된다.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을 선출한 지난 8일 CNN을 비롯한 미 주요 뉴스 방송들은 각 주의 개표 현황을 색깔별로 나눠 분석해 시청자에게 전달했다. TV 화면을 통해 나타난 개표 현황에서 뉴욕시를 비롯해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등 미 주요 도심지역은 대부분 파란색으로 나타난 반면 교외 지역은 새빨간 물결로 뒤덮였다.

도심지역의 대다수 유권자는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을 뽑았지만 교외지역 유권자는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에게 한 표를 행사했다는 의미다.

이런 상황은 경합주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플로리다와 오하이오, 아이오와, 펜실베이니아, 위스콘신 등 이번 선거의 경합주로 꼽힌 곳에서 트럼프는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 유권자의 힘을 빌려 승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민주당의 클린턴 후보는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와 아이오와의 디모인, 오하이오의 콜럼버스, 펜실베이니아의 필라델피아, 위스콘신의 밀워키 등 5개 경합주의 대도시에서는 표를 더 많이 얻었지만 같은 주의 교외지역에서는 대부분 패배하면서 4년 전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했던 경합지를 모두 내줬다.

미 정치권에서는 이번 선거의 결과를 놓고 교외지역에 많이 거주하는 '침묵의 다수'(silent majority)가 '시끄러운 소수'(loud minority)를 제압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는 곧 정치 참여율이 비교적 낮은 교외지역의 백인 보수층이 이번 선거에는 작정하고 투표소를 찾아 트럼프를 뽑았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놀라운 것은 이들 교외지역 백인 유권자들이 선거 전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트럼프를 지지할 것이라는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상당수 백인 유권자가 여론조사에서는 트럼프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인 뒤 실제 투표에서는 그의 이름을 찍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클린턴 후보가 확실한 진보 노선인 버니 샌더스 지지자들의 표를 얻지 못한 것을 패배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고 있다. 새로운 정치를 원하는 민주당의 샌더스 지지자들에게 클린턴 후보는 식상하고 부패한 정치인이라는 인식이 강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클린턴 후보의 치명적인 실수는 마지막 TV 토론회에서 트럼프가 "당신은 왜 월가와 기업인들로부터 강연료로 받은 수백만달러를 선거자금으로 사용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며 시원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클린턴이 월가로부터 거액의 강연료를 받은 것은 이번 선거에서 e메일 게이트보다 더 부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트럼프는 선거 전 직설적인 화법으로 많은 유권자들을 분노시켰지만 상당수 유권자는 겉으로는 맞는 말만 하지만 속은 다른 뜻이 있는 것 같은 클린턴을 외면했다.

현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침묵의 대다수' 유권자를 끌어안지 못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미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가 인종·계층 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는 지적이다.

미국에서는 지난 수년간 경찰 폭력을 비난하는 시위가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열렸다. 전 세계에 어딜 가나 보수층은 '법과 질서'를 중요시한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법과 사회 질서를 유지해주는 경찰을 상대로 시위를 벌이는 행위는 보수층에게 결코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는 유세 기간에 경찰과 재향군인들을 치켜세우며 보수층 백인 유권자들로부터 점수를 땄다.

미국은 유색인종 인구가 증가하는 추세다. 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2065년이 되면 미국에선 어떤 인종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2010년 기준으로 63%인 백인 비율은 50년 뒤 46%로 떨어질 것으로 예측됐다.

하지만 지금은 2016년이다. 아직까지 미국은 백인들 힘으로 움직이는 나라다.

jjung72@fnnews.com 정지원 뉴욕 특파원